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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일 Mar 25. 2021

맥시멀 남편 길들이기

친정과 시댁의 갭 차이



“내년 겨울에나 다시 쓰려나?~"


쓰다 남은 단열 에어캡 한 롤이 옷장 안에 있다.

서늘한 핀잔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두 번 걸음 하느니 한 번에 넉넉하게 사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니. 남편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부탁할 때는 카톡으로 사진을 첨부하거나 정확한 수량을 알려주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라고 말해봐야 이미 늦었다. 남편 인생에 반품이란 없으니까. 우리 집에는 그런 물건들이 꽤나 있다. 언제가 쓸 예정인 미래형, 써 봤지만 실패한 과거형의 물건들.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구입했다는 3m 연장 케이블은 언제까지 저곳에 걸어 둘 생각인 걸까?




그렇다고 내가 항상 옳은 것도 아니다.

나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은 있으니. 물건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버티는 습관이다. 달랑 한 장 남은 마스크를 보고서야 부랴부랴 주문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 남편 속도 답답하긴 마찬가지 일 터. 이렇게나 다른 소비 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혹은 포기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이건 성격의 차이일까? 아니면 살아온 배경의 차이일까?






친정과 시댁의 갭 차이



 치의  공간 보이질 않는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주변의 기운에 홀려서 눈이 계속 돌아간다. 시댁에 내려갈 때마다 모든 물건들이 미묘하게 위치를 바꿔가며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신기한 점은 그것이다. 시어머니는 그 많은 물건을 컨트롤하고 계신다. 사 모으는 걸 좋아하시는 만큼 나눠주는 것도 좋아하셨다. 결혼 초에 거절하지도 못하고 들고 온 물건들이 집 안에 하나둘씩 쌓여갔다. 그런 어머니를 제일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어렸을 때 얘가 그랬어! 어차피 부자도 못 될 건데, 사고 싶은 거 다 사달라고~” 벌써 스무 번도 더 들은 이야기다.




친정의 물건들은 아빠의 검열을 거쳐 통제된다.

필요한 즉시. 수량은 적정하게. 위치가 정해져 있으니 찾아 헤매는 수고로움은 있을 수 없다. 결혼하고 어느 날 아빠의 옷장을 열어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듯하게 걸려있는 바지들. 최소한의 옷들이 흐트러짐 없이 놓여 있었다. 아빠는 미니멀 리스트였다. 어렸을 적 아빠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언니와 나는 장난감을 치우기 바빴다고. 그때부터였을까. 물건에 대한 예민함이나 바지런한 정리의 기술들이 나도 모르게 각인됐던 건 아닐는지. 필요 없는 것을 모으거나 쌓아두는 걸 싫어하셨던 아빠는 어린 내가 정성스레 써서 드렸던 편지를 몇 분 후 쓰레기통에 버리셨다. 삶이 고단했던 아빠에게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치워야 하는 숙제처럼 부담이었으리라.





파지티브와 네거티브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나는 물건들을 팔기 시작했다. 남편의 잦은 출장과 힘들었던 독점 육아 속에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미니멀 유전자가 깨어났다. 그건 어떤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제는 좀 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다가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기저기 빈 공간이 드러나고 쌓였던 먼지들을 치우자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동안의 억압된 감정이나 꼭꼭 묻어 두었던 문제들도 꺼내 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큰 갭이 있었다.

자석의 양극처럼. 극명한 차이가.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시가와 달리, 부정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의 친정은, 곧 남편과 나의 차이이기도 했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알아차려 갔다. 쾌적해지는 공간만큼 나의 마음도 밝아지자 남편도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조건 사고 보는 습관이 줄어들고, 부탁하지도 않는 창틀을 닦기도 한다. 나도 조금 더 내려 놓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하기. 청소는 서로를 배려하는 또 다른 소통 방식이었다. 아빠는 아들에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회사에서 아빠 책상이 제일 깨끗해!~”











남편을 길들인다니 가당치 않다.

그건 일방적인 길들임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조금씩 길들여져 가는 시간이었다. 나의 뾰족한 모서리가 둥글게 깎이기도 하고, 가끔 대책 없이 부푼 희망은 내 쪽에서 바람을 빼준다.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양가의 라이프 스타일도, 파지티브와 네거티브도. 하지만 나 자신은 바꿀 수 있다. 그늘에서 한 발짝 물러나 우리에게 맞는 삶을 꾸려 나갈 뿐이다. 한쪽에서 넘쳐흘러 들어오는 것을 조율하고, 다른 쪽은 좀 더 밀어 넣어가면서.




“이것 좀 당근에 팔아줘~”

(그럴 줄 알았지!)



남편은 반 년동안이나 테이블을 차에 싣고 다녔다. 지인 캠핑에 초대받아 급하게 샀던 그 테이블은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상태였다. 승리의 미소를 내보이며 나는 사진을 찍는다. 이번에도 조금 깨달았을까? 남편의 몸에도 미니멀 유전자가 새겨지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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