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세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
오늘의 증상 : 15시간 수면. 왼쪽 귀에 약한 이명 있었으나 약 복용 후 개선.
힘들었던 5일간의 회사 복귀를 끝내고 맞이한 토요일.
친한 언니가 “정재찬 교수님 강의가 있다, 같이 가자”는 말에 따라나섰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부산독서문화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라네요.
덕분에 오랜만에 보수동 나들이를 했습니다.
보수동은 부산의 헌책방 거리로 유명합니다. 6.25 전쟁 시절 이 인근에 피란민을 위한 천막학교가 들어서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중고 참고서 등을 파는 곳이 생겨났는데요,
그것이 규모를 더하며 부산의 명물 '책방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도 학창 시절, 헌책방에서 영어사전이나 참고서를 사며 새 학기를 맞곤 했습니다.
책은 늘 새것처럼 깨끗했지만, 정작 공부보다는 ‘사기만 해도 뿌듯’한 기분에 만족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새것 같던 헌책’을 진짜 헌책으로 만들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네요.
세월이 흐르며 책방거리는 많이 줄었지만, 저에겐 여전히 ‘보물찾기’의 설렘이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의가 열린 곳은 책 모양 건물 ‘아테네 학당’. 책방거리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정재찬 교수님의 주제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시 읽기’.
저는 미혼이지만, 강의를 들으며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눈물이 핑 돌았답니다.
저는 시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역사·철학·심리 같은 인문서를 좋아하고, 취미는 중국 웹소설 읽기.
학창 시절에는 ‘형식과 심상’을 찾는 데만 매달렸기에, 시는 늘 과제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만난 시는 달랐습니다.
마른 오징어같이 말라붙은 제 마음에 수분을 채워주고, 오래 잊고 있던 감성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늘 ‘출고’만 강요받던 제 삶에, 이제야 ‘입고’가 필요했음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강의 후에는 축제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특히 “책 처방” 코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의 어려움, 억지로 독해지려 했던 지난날, 위로가 필요했던 속내와 제 감성에 말랑함과 유연함을 더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주절주절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은 끝까지 들어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해 보이지 않아요. 억지로 독하려 하니까 더 힘든 거 아닐까요?”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20년 직장 생활 동안 제가 추구했던 건 ‘만만치 않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제 롤 모델 중 하나가 된 동기 언니가 있었습니다.
언니는 늘 파워 당당해서 신입사원임에도 누구 하나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저는? 홍시처럼, 누구나 농담 한마디로 찔러볼 수 있는 물렁한 존재였지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동기 언니처럼 파워 당당한 사람이 되겠다는 강한 다짐이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겉으로는 그 점을 완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 회사에서 억지로 가시를 세운 생활은 너무 피곤했습니다.
진짜 강함은 억지로 만든 독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길러낸 유연함과 의연함이 아닐까.
제 마음은 아름다운 언어와 감성 그리고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퍅한 제 마음에 유연함과 아름다움을 더 해줄 시를 읽기로 했습니다.
언니는 시집을 선물해 주었고,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책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림책 전시 관람, 에코백 그리기, 책 향수 만들기 등 독서문화대전을 알차게 즐겼답니다.
그 결과는요?
어제 오후 6시에 잠들어, 오늘 아침 아침 8시까지 무려 14시간 숙면. 그것도 수면제 없이요.
책과 사람은 제게 또 다른 처방전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처방 덕분에, 다시 한 주를 살아낼 힘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