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먹이면 밥을 안 먹고 밥을 먹이자니 약을 못 먹이고
어제의 쓴 실패를 뒤로 하고 아침에 참치를 조금 먹였다.
짭짭 조금 잘 먹나 싶더니, 다시 약을 들고 오니까 낌새부터 눈치채고 도망가버린다.
강제로 입을 벌려 넣다가 1차 실패, 다시 으깨진 약을 넣으려다 2차 실패
살짝 녹은 캡슐을 동그랗게 말아서 쑤셔넣으니 발광을 한다.
하지만 아픈 걸 줄이려면 약을 먹어야 하는 걸.
쓴 맛이 너무 강했는지 거품을 줄줄 물었다.
거품을 닦아주려고 하니까 삐졌는지 도망가 버린다.
건네준 츄르도 참치도 물도 먹지 않는다.
미안하기 그지 없다.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약 먹이고...
오늘은 회사 행사가 있는 날.
마침 엄마가 출근을 안 하길래 라따를 부탁하고 아침 일찍 회사를 나섰다.
라따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종일 행사에 전념했다.
커피 마시며 숨 돌릴 오후 서너시 즈음에야 카톡을 봤다.
라따가 토를 했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세네 번이나.
너무 놀라서 냅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토를 했느냐, 토 색깔은 뭐였느냐, 뭘 토했느냐...
다다다다 물으니 동생이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고양이 특성상 돌아다니면서 토를 했고,
요 며칠 간 사료를 먹지 않아서 첫 번째 토는 온통 참치였고
서너 번 째는 거의 물이었다고.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은 사료토를 했다는 거구나.
먹은 것도 없는데 나머지도 소화 못하고 토해 버리다니...
소화 기능이 떨어졌다는 뜻이라 너무 걱정이 되었다.
일을 마치자마자 라따의 약을 새로 받으러 동물병원에 갔다.
지난날 눈물로 얼룩져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기억하는지
라따, 단어를 듣고 "아...~ 네, 바로 접수해드릴게요." 라고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현장 예약이었지만 대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며칠 뒤에 다시 만난 의사 선생님께서 라따의 경과를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검사 다녀온 날은 밥을 잘 먹었지만,
약을 먹은 뒤로부터 밥을 안 먹는다고. 오늘은 츄르도 거부했다고.
숨 소리는 깊게 관찰하니 색색 호흡이 빠른 게 눈에 보이고
장난감도 잘 갖고 놀지 않는다고. 말하고 보니 온통 부정적이다.
밥을 먹지 않는다는 말에 선생님께서는 두 가지 사례를 말하셨다.
첫째, 약을 먹는 스트레스와 쓴맛 때문에 입맛이 떨어져 먹지 않는 것.
둘째, 폐에 물이 가득차 호흡 자체가 힘들어 무언가를 먹고 삼킬 여력이 없는 것.
어쩌면 둘다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약에 대한 거부 반응이 심하면 진통 패치나 바르는 약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기간은 3일밖에 가지 않는단다. 그리고 3일마다 병원에 와야 한다.
아마 외출하는 스트레스가 약을 먹는 스트레스보다 크지 않을까 싶어
손가락이 찔리는 한이 있더라도(이미 찔렸다) 그냥 약을 먹이겠다고 했다.
사정을 이해한 선생님이 약을 하루에 1번으로 줄여주셨다.
좋은 건 아니다. 약은 꾸준히, 규칙적으로 먹어야 고통이 덜할 테니까.
집에 돌아오는 내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차하면 강제 급여를 하겠다는 내 말에 주사기와 액상사료를 추천해주셨다.
집안에는 라따를 위해 사둔 로얄캐닌 건식, 습식 사료도 있었다.
그래, 뭐든 먹여보자. 간식이든 사료든 먹어야 힘이 나지.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었다. 바로 라따가 사료를 먹었다는 것이다!
토 하고 나서 배가 고팠는지 힘이 들었는지 건식 사료를 먹었다.
혹시 몰라서 급히 습식 사료를 꺼내 보는데, 이 녀석은 아직 낯을 가리는지 먹지 않는다.
그런데 기존 사료를 또 먹고,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었다.
너무 다행이다. 배가 고프면 그래도 먹는구나...
아파서 못 먹는 게 아니고, 약을 먹기 싫은 스트레스가 정말 컸구나.
아빠는 라따가 밥 못 먹는 게 더 걱정 되는지, 오늘은 약을 주지 말라고 했다.
라따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약이지만, 먹는 게 더 스트레스라면
오늘 만큼은 밥을 잘 먹는지 지켜볼 겸 주지 않기로 했다. (따라하지 마세요)
약을 캡슐에 넣어서 주든, 물에 타서 주사기로 급여하든, 츄르에 섞든
내일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약을 다시 먹일 생각이다.
아픔을 줄여주기 위한 선택이 수명을 당기는 지름길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아무튼, 밥을 먹는 라따의 모습이 이렇게 기쁘고 뿌듯할 줄 몰랐다.
내일은 주말에 일정이 있어 외박을 해야 하는데,
라따에게 별 일 없기를. 밥도 잘 먹어주기를.
한 그릇, 한 팩의 사료 중 한 알이라도 좋다.
조금이라도 먹어서 힘을 낼 수 있게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