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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여우 Jan 13. 2019

"나를 위로하는 그림"

세상은 눈물을 모이게 했고 그림은 눈물을 떨어지게 했다

얼마 전 서로 자주 책을 추천하는 사이였던 미국 이민자 후배 A가 잠시 한국에 들렸다. 세계 어디에 있더라도 이질감이 없는 밝은 성향의 사람이라, 이민자의 서러움이나 향수병 따위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한글 활자로 된 종이책에는 늘 갈증이 나고 아쉽다고 자주 이야기했던 터라, 나는 A의 귀국길에 선물할 책들을 미리 몇 권 꾸렸다. 그중 하나가 "나를 위로하는 그림"이다. 불현듯, 그간 내 추천서들은 주로 그림, 문학작품, 영화비평과 에세이들이 많은  많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챘다. 왜 였을까.


세상의 파도에 휘청거릴때면 가장 좋은 '쉼'을 주는것은 늘 활자와 그림이었다.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이 없어도, 굳이 큰 힘이나 비용이 들지 않아도, 캄캄한 동굴에서 나를 다시 꺼내고 일으켜 세운 것은 그림과 책이었고, 생이 고달플수록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그들과 함께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그것은 마치 깊은 잠속으로 들어가 뭔가 한바탕 꿈을 꾸고 깨어났는데, 무슨 꿈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않고, 진한 여운만 남아 일상에 잔잔히 흐르는 것, 그런 느낌일 뿐...


며칠 전 "성장 문답"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윤대현 정신과 의사가 하는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된 것 같다. 예술, 책들 문화콘텐츠를 바라볼 때 우리 뇌와 마음에서는 특별한 활동이 일어나는데, 나를 그 문화콘텐츠에 투사(Projection)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그림,문학속으로 영사기로 영상을 쏘듯이 투사하고, 내 인생을 영화처럼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고군분투하는 1인칭 주인공이 아닌, 3인칭 관찰자로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림과 문학 속에서 여러 모습의 나를 마주하고 연민하고 견디고 치유받는 것이다.


 

"나를 위로하는 그림"의 문장들

- Page 47 빈센초 이로리 <창가에서>


마음이 에스프레소 맛이다. 그런 날이 있다. 농축된 쓴맛이 입안에 계속 맴도는 날.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에는 항상 속수무책이다. 마음을 괴롭힐 때마다 찾는 것은 언제나 커피다. 커피는 우리가 더 이상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책이다.
....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어느새 땅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마당에는 물결이 일렁인다. 화단에 핀 꽃들이 고개를 들어 흠뻑 비를 맞고 잎사귀들도 비바람에 몸을 맡긴 채 살랑살랑 흔들린다. 그 모습이 하늘은 슬픔에 울고 나무와 꽃은 즐거움에 웃는 것 같다.....
여인은 깊이 생각에 잠긴 채 한적하고 고요한 아침을 맞는다. 은은한 빛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촉촉하게 스며들고, 한 잔의 커피에 온 마음을 기울인다.


- Page 190 <햇빛이 그는 골짜기>


산 정상에 서 있는 여인의 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것만으로,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한 기분이 드는 장면이다.
....
삶이 아슬아슬했다. 벼랑 끝을 걷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캄캄한 아래로 계속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끝 모를 늪에서 버둥질하고 있을 때쯤 이곳에 왔다.
흔적도 없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안의 작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순간 아찔했다. 어쩌면 추락은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하늘을 날자 나무 대신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무겁고 웅장해 숨이 턱턱 막히던 내가 살던 세상이 이토록 작고 보잘것없음에 쓴웃음이 나면서도, 다시 힘겹고 지루한 일상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 안도할 수 있었다.





-Page 170

변화가 많은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는 지속되는 장마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온몸이 함씬함씬 젖어 마음이 축축 늘어졌다. 좌절은 끝이 없었고 희망은 부질없었다. 그러나 자연 앞에서 좌절은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았다.
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가혹한 세상에서 잠깐의 휴식을 느낄 수 있어 감사했고, 천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자연 속에 파묻혀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자체로 매 순간 완성이지만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자연, 자연이 들려주는 좌절 속 희망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의 삶은 좌절을 이겨내려는 미숙한 희망으로 허덕인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늘 이렇게 즐겁고 또 버거운 일이다.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던 사실 하나, 좌절과 소나기는 곧 그칠 것이다.


-Page 91

아무도 없다. 여인을 휘감고 있는 베일만 있을 뿐이다. 끝내 벗어날 수 없던 기억을 숨기기 위해 몸에 익은 습관이 겨우 상처를 덮는 일이다. 눈을 감자.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상처들이 그녀 주변으로 모여든다. 유폐된 상처들이 그녀 주위를 휘휘 선회한다.... 너무 아픈 나머지 입때껏 서늘하게 새겨져 있다..... 드러내 놓고 아파할 수 없는 슬픔들이 낮게 절규하고, 눈물은 강박처럼 달라붙는다. 그런데 눈물을 흘려보내는 여인의 모습이 의외로 담담하다. 극도로 차분해서 위태롭고 요란스럽지 않아 더 절박하다.
....
이 그림을 보고 '상처'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인의 눈빛은 분명 상처였다.... 누군가 어찌하여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명석한 감정보다 분명한 의미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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