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와 유령

by 한 나강

발작 센서

남들은 예측하기 힘든 위치에 유별나게 감도 높은 센서가 달려있음. 소프트웨어 오류로 조금만 터치해도 발작이 실행. 가뜩이나 이런데 제대로 건드리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안으론 확인불가. 여러 개의 눈앞에서 말간 얼굴로 덮어버리는 난장판.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가 되고 나서야 온몸을 부르르 떤다. 그제야 여기저기 부딪고 싶던 마음이 고스란히 제 형체를 드러낸다. 사실은 들이받고 싶었다. 있는 힘껏 달려가 박치기라도 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는 때로 예상치 못한 결말을 불러와 애먼 사람에게 살 떨리는 분노를 전가하고, 거울 속의 나까지 치가 떨리도록 만든다. 안타깝게도 그 격정적인 추돌은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고 나서야 멈춘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어린 시절 두 번 다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붙들었던 동아줄. 끝내 내 목을 조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던 한 마디.


세 번의 이별 이후 다시 만난 엄마는 종종 나 때문에 산다는 말을 노래처럼 했었다. 끝을 모르고 이어졌던 큰딸과의 혈투, 그 숨막히는 공간 사이사이를 막내딸의 장난기 어린 웃음과 애교가 파고들었다. 고 예쁜 짓은 당시 엄마에겐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의 보급품과도 같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할 엄마가 부디 나를 붙들고 놓지 않기를, 그래서 두 번 다시 내가 덩그러니 버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칭찬으로만 들었던 말에 실은 목숨 걸고 매달려 있다는 걸,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아이는 자란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졌고 스물이 넘어선 늦깎이 사춘기도 거쳤다. 단지 문제라면 견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대가리만 커졌다는 점이다. 한사코 자라려는 나를 더는 받쳐줄 힘이 없었다. 결국 꺾여 버린 고개는 내가 홀로 서기에 틀렸단 걸 증명했다. 알아도 모른 척, 슬퍼도 아닌 척, 웬만해선 해맑아야 할 어릿광대의 얼굴로 살아간다. 이건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차례로 잃었던 꼬맹이는 사람들 앞에서 약자를 자처하곤 했다. 손에 쥔 동아줄을 도무지 놓을 줄을 몰랐다. 누군가 수면 위로 머리를 끌어올려주길 기다리며 한껏 나를 참았다. 이 세상은 감히 내가 있을 곳이 못돼. 진짜는 꼭 물밑에 가라앉아야 하지. 얼른 예쁜 얼굴 해야지. 나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여야 빼꼼 밖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면 겨우 숨이 쉬어졌다.


쟨 착해. 착해야만 하지.

쟨 재밌어. 재밌어야 하지.

쟨 생각이 없어. 없어야만 하지.


심각함이라곤 모르는 장난꾸러기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외줄도 타라면 벌벌 떨며 타는 인간이 그런 일이라곤 겪어본 적 없는 듯 빤한 얼굴을 하곤 했다. 친정에만 가면 뒤집어쓰는 빨갛고 까맣고 하얀 물감들. 익살스러운 말소리 뒤에 감춰둔 숨소리. 우울한 만큼 더 깊이 더 오래 숨어선 남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반쪽짜리 얼굴. 부지불식간에 의식으로 출몰해 덫을 놓고, 감시하고, 협박 편지까지 보내는 공포스러운 존재. 그는 느닷없이 온갖 무서운 일들을 저지르곤 매번 저만 아는 비밀통로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두 눈으로 콧속으로 날아드는 흙더미에 기침 한 번을 못하고 꿀떡 삼키는 인간이다. 고작 눈만 찡긋거리다 헤헤 웃어버리고 마는 알록달록한 가면이다. 자꾸만 울렁거리는 게 무엇일까. 마음속 커다란 너울을 따라 망망대해로 흘러가는 유령의 잔해. 이쯤 되면 가해자가 광대인지 유령인지 헷갈리는 지점이다.


아닌가. 둘 다 피해자인가. 하나엔 죽음을, 다른 하나엔 웃음을 강요하는 진정한 가해자를 찾는다.


견디지 못하는 일들을 견디지 않으면 어떨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반기를 든다면. 험악한 얼굴을 내보이고 '나 여기 있소' 해버린다면.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는 게 왜 이토록 힘든 건가. 내가 뭐 다 잡아먹겠다 했나. 아래로 더 아래로 줄곧 밀어 넣기만 했던 감정들이 언젠가부턴 조금만 건드려도 발작을 일으키는 괴물이 됐다. 슬쩍 보기만 해도 무서운 얼굴이 제 분에 못 이겨 파르르 떨고 앉았다. 그래서 지금 저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바라만 본다.


당신, 나 때문에 살지 마요. 나 같은 거 버리고, 당신 삶을 살아요. 만한 자격 없거든요. 그럴 힘도 없고요. 그저 생긴대로 살고 싶어요.


실은 나도 모르거든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무얼 좋아하고, 어디를 가고픈지. 다만 웃고 싶지 않아서요. 그냥 그 말을 하려는 거예요.


힘들 거란 걸 안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순 없어서 여기저기 부스러기 같은 들을 그러모은다. 나인지도 몰랐던 무수한 순간들, 스스로가 지워버리고 묻어버렸던 마음속 이야기들에 귀 기울인다. 아름답지 않아도 좋으니 그것들로 나를 만들어 달라고.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아 달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가 언제쯤 먹힐지.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