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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un 15. 202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강인하게 견디는 자의 위대함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감상하는 동안 두 가지 영화가 뇌리를 스쳤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목소리의 형태>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다.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해 보자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휴머니즘을 끌어올리는 데에 있어 <밀리언 달러 베이비>보다는 못하지만, <목소리의 형태>와는 확실히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목소리의 형태>는 청각 장애를 주요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닮아있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그만큼 차이점이 존재하는 영화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어째서 좋은 작품인지에 대한 이유와, 비슷하면서도 결국에는 다르게 다가오는 영화인 <목소리의 형태>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청각 장애의 고충, 청각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관계의 단절을 복원하는 과정, 단절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장벽의 중압감을 견디어 끝내 뛰어넘는 강인함이 바로 그 주제들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화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목소리의 형태>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목소리의 형태> 역시 관계의 단절과 복원을 그리는 작품이다. 하지만, 청각 장애라는 요소가 주제로까지 기능하는가, 아닌가에서 차이는 발생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청각 장애는 끊임없이 부각되는 메인 주제이다. 하지만, <목소리의 형태>의 청각 장애는 끊임없이 부각됨에도 관계의 단절과 복원을 그려내는 도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다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되돌아가보도록 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청각 장애 묘사는 정말 훌륭하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장면은 입 모양을 보고 상대의 말을 해석하여 대화하는 구화가 코로나 시대에 들어 마스크를 착용하게 되면서 활용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장면과, 시합에서 승리한 후 기념사진을 찍는 동안 웃으라는 사진사의 간단한 말조차 듣지 못해 시종일관 굳어있는 케이코의 모습을 롱 테이크로 담아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일상생활에 있어 얼마나 큰 지장이 되는지 깨닫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케이코의 청각 장애가 고충에서 끝나지 않고 그녀의 열정과 노력으로까지 이어져 연출된다는 점에서, 훌륭함은 배가 된다. 나는 이러한 미야케 쇼 감독의 연출을 리듬감의 연출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리듬감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그 리듬을 반복적으로 따르며 끝내 체득해 낼 것이다. 그러나, 케이코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복싱을 계속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리듬감을 체득하는 데에 있어 비장애인에 비해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케이코는 동체시력과 사인만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리듬감을 체득해 내는 데에 성공하고, 심지어 비장애인 선수와의 시합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다. 미야케 쇼 감독은 그 과정을 롱 테이크로 길게 잡아낸다. 그렇게 케이코가 리듬감 있게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 스텝을 밟는 모습, 상대를 응시하는 모습은 전부 관객의 눈에 길게 아로새겨진다. 덕분에 관객은 케이코의 훈련이 담긴 롱 테이크가 지속된 시간만큼, 길었던 그녀의 열정과 노력에 찬사를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케이코에게는 쉽사리 극복해내지 못했던 것이 존재했다. 소통으로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보통적인 관계는 서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해 내는 소통에서 시작되고, 발전한다. 하지만, 케이코는 그 소통에 있어 불리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다. 소통은 대부분 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케이코는 자신의 마음을 쉽사리 전달해 낼 수 없다. 영화 중반에 여자를 가르치는 체육관에서는 강해질 수 없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탈퇴하는 회원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는 마음을 대화로 전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에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는 자와 선택할 수 없는 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케이코는 그런 비장애인과의 상당한 차이만큼 몇 배의 고민을 해야 한다.

 

여기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케이코가 같은 청각 장애인 지인들과는 아무런 장벽 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며, 소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미야케 쇼 감독은 그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고, 케이코와 비장애인들 간의 소통과 확실한 대비를 주기 위하여 케이코와 그녀의 청각 장애인 지인들이 수화로 소통하고 있는 장면에는 자막을 일절 달지 않았다. 덕분에 케이코와 청각 장애인 지인들의 소통 장면은 분명하게 대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비장애인들과 방법이 다를 뿐이지,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대화가 끝이 나면 케이코는 다시 기나긴 침묵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대화와 편지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세계로, 강제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에 고민하는 케이코의 모습은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선택지가 없는 케이코에게 체육관을 쉬겠다는 생각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글로 써서 전달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 전달에 있어서는 상당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 와중에 더욱 안타까운 것은, 휴식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게 되리라는 두려움과, 자신이 체육관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미안함은 전달하지 못한 채 그녀의 마음속에 맺혀 있다는 사실이다. 케이코는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 혼자야.' 결국, 케이코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실망했다는 원망까지 받아가며 스스로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케이코가 자신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감정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확실하게 전달해 내었을 때, 서로를 신뢰했던 그녀와 주변인들의 관계는 금세 복원되어 새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케이코의 한 가지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분명 모두들 눈치채셨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케이코가 할 수 있는 말은 '네' 한 마디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 한 마디는 내뱉어질 때마다 케이코의 마음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케이코는 프로가 되고 싶냐는 회장의 질문에 '네'하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또한, 시합을 취소해도 된다는 회장의 말에 '네'하고 자신의 심란한 마음을 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합에 나가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네'하고 전달했다. 특히, 세 번째 '네'는 케이코의 변화를 확실하게 나타내는 수단으로써, 매우 중요한 대사다. 케이코가 변할 수 있던 계기는 자신의 마음을 적은 일기를 회장과 회장 부인에게 보여주었을 때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해 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 마음이 회장 부인에 의해 소리로 전달된다는 것이 꽤 인상적이다.

 

회장 부인이 케이코의 일기를 읽는 동안, 케이코는 조금씩 소통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소통은, 얼굴은 몇 번 보았지만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남동생의 여자친구와 비로소 제대로 마주 보고, 함께 복싱을 연습하며, 춤추는 장면을 통해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지나간다. 그런 케이코가 보여준 일련의 변화들을 상징하는 대사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세 번째 '네'인 것이다. 이제 케이코에게는 시합만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패배한다. 결국 청각 장애인이 겪는 고충은 부당함이 되어 케이코에게 돌아온다. 시합 중 발을 밟혔음에도 이를 목소리로 낼 수 없는 부당함을 케이코는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장면은 세상에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 장애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련의 소통과 관계 복원 덕분에 승리의 희망을 보고 있던 관객들로 하여금 냉정하게 깨닫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 장애를 타고났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발을 밟았던 상대 선수와 우연히 마주 보게 되었다고 해도, 이전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케이코는 수없이 고민하고, 마음을 전달하며 상대와 소통했다는 그 사실만을 자양분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분명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인하니까. 오가와 케이코는 들리지 않는다는 페널티를, 상대의 펀치를 맞았을 때의 아픔을,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폐를 끼치고 있다는 미안함을,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아쉬움을, 회장의 다정함에 역으로 느낀 슬픔을 모두 견뎌낸 강인한 복싱 선수니까. 이제 글의 끝을 맺을 때다. 이 영화는 강인하다. <목소리의 형태>가 함께 벽을 넘어가는 영화라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강인하게 견디어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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