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으로 거스르는 시간, 그 안의 우리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다시 감상하는 동안, 나이에 따른 시간의 상대성을 절실히 느꼈다. 노인의 시간은 짧고, 아이의 시간은 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두고 보면, 시간은 노인의 편이다. 결국, 시간은 짧고, 빠르게 흘러가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이 슌지 감독의 11년이라는 시간 역시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2004년 공개된 <하나와 앨리스>로부터 11년이 흐른 2015년에 공개되어야 할 프리퀄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은 그렇게 공중분해될 것처럼 보였다. 이에 이와이 슌지 감독은 1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애니메이션의 힘을 빌어 멈춰버린다. 실사 영화의 카메라는 배우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촬영하여 화면에 내보인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의 작화는 인물의 모습을 원하는 대로 창조하여 화면에 내보인다. 그러한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활용한다면, 아오이 유우와 스즈키 안이 연기했던 2004년의 하나와 앨리스의 모습을,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채로 2015년의 프리퀄에 내보일 수 있다.
그리하여 현실의 시간은 작품 속의 시간을 향하여 역행하고, 멈춘다. 현실의 시간, 2015년의 아오이 유우와 스즈키 안이 펼친 연기를 로토스코핑 기법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그려 넣는 순간, 현실의 시간은 2015년에서 역행하여 2004년의 아오이 유우와 스즈키 안의 시간에서 멈추는 것이다. 그렇게 멈춘 시간은 작품의 시간이 된다. 덕분에, 시간의 편린으로서 영원히 과거에 남을 것만 같았던 소녀들의 시간과 마음은, 영사기의 회전과 함께 현재의 화면으로 영사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의 눈에 아로새길 수 있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을 기나길게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와 앨리스의 여정을,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했던, 지나간 시절의 아름다움을.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다. 그 거스름의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했던, 지나간 시절의 영사이다. 영사가 끝나면, 우리는 지나간 시절을 추억의 한편에 고이 접어두고 앞을 향해 걷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껴지며 우리에게 지나간 시절의 추억을 선사하고 마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우리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길고도 길게 느꼈더랬다. 그런 시간을 훗날 돌이켜보면, 참 빠르게도 지나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킴'이야말로, 시간의 상대성을 깨닫게 만드는 행위는 아닐까? 아저씨와 테츠코가 그네를 타는 장면에서, 아저씨는 그네를 타며 몇 년만이냐는 테츠코의 물음에 40년 만이라고 답하고는, 참 짧았다고 독백한다. 아저씨는 테츠코의 물음에 자신의 삶을 '돌이켰다'. 그 순간, 아저씨가 살아온 시간은 짧은 것이 된다. 테츠코는 그런 아저씨의 대답을, 돌이킴을 이해하지 못한다. 돌이킬 시간보다 나아갈 시간이 더 많이 남은 테츠코에게, 지금 이 순간은 기나길 뿐이니까. 그런 아저씨와 테츠코, 두 사람이 타는 그네는 아이러니하게 흔들린다. 짧은 시간을 깨달은 아저씨의 그네는 느리게 흔들리고, 기나길게 느끼는 테츠코의 그네는 빠르게 흔들린다. 시간은 늙은이에게 선물을, 젊은이에게 깨달음을 선사하려는 것이 아닐까.
테츠코는 기나길게 느끼고 있는 시간이 사실 짧고 빠르게 흐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런 시간을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보내고 있다. 하나와 함께했던 유다의 추적과 눈물 젖은 하룻밤의 발레 연습은, 언젠가 테츠코가 시간의 상대성을 깨달아 과거를 돌이켰을 때, 아름다운 추억의 한 조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 한 조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품게 될 것은 테츠코만이 아닐 것이다. 하나 역시 그러할 것이고, 화면 너머의 우리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누구나 짧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누구보다도 기나길게 느꼈던 그때 그 시절을 보내왔다. 혼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어두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훗날 돌이켜보면 우리의 곁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시절을 우리는 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눈물 흘린다. 그 시절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재연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애니메이션은 그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역행시킨 시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제를 꿰뚫는 문장을 기억하시는지?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간은 그저 갈 길을 간다.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저마다가 정하는 것이다. 하나와 앨리스는 짧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기나길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청소년기를 무의식적으로 아름답게 보내기로 정한다. 그리하여, 하나와 앨리스의 시간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지나갈 것이다.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슬픈 일이다. 빠르게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니,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니. 애니메이션은 그런 슬픔을 이해라도 하듯 시간을 역행시켜 모두의 화양연화를 압축한 하나와 앨리스의 시간에서 멈춰버린다. 그 순간, 우리는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돌아간 시간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결국 시간은 다시 흘러야 한다. 우리는 앞을 보고 살아가야 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은, 누구나 마음속 한편에 간직해 두었을 아름다운 그때의 그 시절을 화면에 영사한다. 그 순간 우리는, 화면 속에서 뛰노는 하나와 앨리스의 모습을 눈동자에 아로새기면서, 저마다의 화양연화를 추억하고, 끝내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존재,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결국 화양연화의 상영회는 언젠가 끝이 나야 하고, 마음속 한편의 추억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영화라는 매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의 화양연화는 언제든 영사될 수 있을 것이고, 되돌릴 수도 있을 테니까. 추억은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자, 기대이다. 과거를 추억하는 만큼, 우리는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현재를 함께 살아간다. 어째서 함께일까? 그 답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보내가는 하나와 앨리스처럼, 우리의 화양연화에도 언제나 누군가가 함께했다. 그렇다면,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현재에도, 우리는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