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흔들리는 시대와 도래하는 변화의 통과점, 지금 이 순간

by 나가레보시


2024년 12월 03일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세상이 수십 년 만에 다시금 흔들린 날이었다. 낡은 사상이 기존의 질서에 도전한 끝에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시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지탱하고 있었다고 믿었던 모든 질서들이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다. 시대가 흔들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그날 이후로 자리 잡은 근본적인 질문은 줄곧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섯 달이 지났다. 소라 네오 감독의 영화 <해피엔드>를 보았다. 영화의 엔드 크레디트가 전부 올라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했다. 시대는 흔들리면서 변화한다. 낡아버린 질서로는 흔들리는 시대를 지탱할 수 없으며, 변화에 대응할 수도 없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영화가 비춘 새로움의 의미를.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빨리 떠올렸다면 좋았을 텐데.


<해피엔드>는 일종의 통과점, 혹은 끓는점을 반영하는 영화이다. 좌익의 영화도, 우익의 영화도 아니다(굳이 따지자면 좌익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외친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하나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지킨다고 한들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무조건적으로 외친다고 한들 흔들리는 시대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무조건적으로 지킨다고 한들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흔들리는 시대 앞에서, 도래하는 변화 앞에서 모든 것은 낡아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탱해야 할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결국 우리는 낡아버린 것들을 버려야만 한다. 새로움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새롭게 흔들리는 시대를, 도래하는 변화를, 끓어오르는 순간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에 소라 네오 감독은 일본의 시간을 떠올린다. 비유적으로도, 실제로도 일본은 흔들리고, 변화하며, 통과한다. 일본은 항상 그런 나라이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시대가 흔들렸다. 일본은 변화했다. 로망과 함께 다이쇼 시대는 끝을 맺었고, 폭주와 함께 쇼와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통과했고, 무너졌다. 2011년, 토호쿠 대지진이 일어났다. 시대가 흔들렸다. 일본은 변화하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듯 보이며 헤이세이 시대는 끝을 맺었고,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듯 보이며 레이와 시대는 시작되었다. 그렇게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근미래에는 난카이 대지진이 일어난다고 한다. 시대는 흔들릴 것이다. 일본은 변화할 것이다. 무언가 끝을 맺을 것이고, 무언가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통과할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역사이다. 간토 대지진의 변화는 명백하게 잘못된 변화였다. 토호쿠 대지진의 변화는 어떨까? 난카이 대지진의 변화는 어떨까?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런 만큼 과거로부터 얻는 반면교사와 현재의 선택은 항상 중요하게 작용한다.


재난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또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도록 강요한다. 결국 일본인들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하여 선택해야만 한다. 변화하는 길을, 새로워지는 길을. 카메라는 그 희망을 담아낸다. 새로움을 보다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이들의 모습을, 그들만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의 모습을, 그 연속으로 변화할 모습을 담아낸다. 끝내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의 존재를, 카메라는 담아낸다. 하지만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결국 양면이란 존재하기 마련이기에, 변화를 선택한 새로운 사람들의 뒤편에서 낡은 사람들은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는 선택을 한다. 혹은 간토 대지진의 시대를 따르는 선택을 한다. 다만 조선인이 시간이 흘러 재일 한국인이 되었을 뿐인 것처럼,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은 낡은 사람들에게도 시간은 흘러 새로움이 주어진다. 그 괴상한 균형의 시대가 바로 <해피엔드>의 배경이자 통과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변하지 못한 낡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움은 그 역시도 낡아버린다는 사실을. 영화는 이 역시 비춘다. <해피엔드>의 배경은 여러 첨단 기술이 조금 더 상용화되어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도 도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근미래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교장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무분별한 감시와 통제라는 낡은 부조리를 저지르고, 경찰들 역시 사진 촬영 한 번에 신원을 조회할 수 있는(사실 이것부터 잘못됐다) 새로운 기술로 오래된, 낡은 차별을 저지르며, 정부는 상용화된 홀로그램 비슷한 기술로 긴급사태조항을 발령한다. 이는 비단 영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당장 우리의 현실에도 국가가 인공지능에 투자하여 만든 거대 기업의 이익을 국민에게 분배해서 감세를 이루겠다는, 낡아버린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자들에게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예절 운운하며 교장에게 순응하는 아이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흔들리고 변화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흔들리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시대는 썩어버리기 마련이고, 죽어버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지 않은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흔들림과 변화의 증명이다. 그것은 순리이다. 억지로 막아서는 안 된다. 낡은 사람들은 자유는 좋지만 책임 역시 따른다며, 어린아이들에게 그것은 너무 무거운 것이라며 책임을 진다는 행위를 악마화하고 끝내 자유를 억압한다. 물론 자유에 책임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자유론>에도 나오는 기본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새로워질 수 없다. 변화할 수 없다. 지탱할 수 없다.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영원히 어린아이인 채로 썩어버릴 뿐이고, 죽어버릴 뿐이다. 책임이란 또 다른 흔들림이니까.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스스로 책임을 지면서 어른이 된다. 새로워진다. 따라서 모든 자유에 책임을 지는 유타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긴다.


일본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소라 네오 감독의 영화 <해피엔드>는 그 사실을 지진이라는 비유, 혹은 사실과 함께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헌법의 개정, 긴급사태조항의 발령, 이어지는 시위... 모든 것이 극단적이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호들갑이냐며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근 다섯 달 동안 나는 영화 속 설정보다도 극단적인 장면들을 목격했다. 대통령이 불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의사당을 침공했고, 집권이 확실해진 야당은 친위를 위하여 일방적으로 삼권분립의 종말을 고하며 사법부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모든 질서들이 낡아버렸다. 시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끝내 강요되는 변화 위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워질 차례이다. 낡은 사람들이 새로워지지 않고 썩어 문드러지는 길을 선택했다면, 나는 새로워지는 길을 선택하겠다. 넘어질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일어날 것이다. 나는 살아남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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