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루.

일본 애니메이션을 망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by 나가레보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나가이 타츠유키는 언제나, 무조건, 크든 작든 반드시 결여를 남기는 감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작품들 중 유일하게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영화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 역시 순수의 왜곡을 저지른 작품이었고(그나마 이쪽은 그것이 별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언제나 그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료 각본가 오카다 마리는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에 이어 영화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이라는 훌륭한 작품을 감독, 동료가 저지른 왜곡을 바로잡아내기에 이른다. 조금 더 비판적인 시선에서 이야기하자면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의 불세출의 출세작 TV 애니메이션 <그날 본 너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마저도 눈물이라는 가장 큰 목적을 위하여 더욱 세밀하게 그려내어야만 했던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를 내던져버리고 만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후레루.>의 비판 역시 이 지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후레루.>는 <그날 본 너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이하 <아노하나>)와 같은 결여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판타지적인 사건의 종결을 향하여 달려가는 동안 분명 중요하게 작용해야 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가 실종되어버리고 마는 것. 이들은 <아노하나>에서는 멘마의 성불과 친구들의 눈물을 강조하기 위하여 무시된 것이었고, <후레루.>에서는 세카이계적 해피엔딩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정 이상으로는 깊이 추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나마 각본가 오카다 마리의 터치 덕분에 조금씩 드러나려 하는가 싶다가도,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의하여 가로막히고 만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란 무엇인가? 감독 나가이 타츠유키? 물론 그 역시 범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각본가 오카다 마리가 다시 한번 감독이 되어가면서까지 <앨리스와 텔레스의 환상공장>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만 보아도 나가이 타츠유키는 더 깊은 곳까지 손을 뻗으려는 감독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뒤에 있는 한 인물을 지목하고 싶다. 프로듀서 카와무라 겐키. 나는 그를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망치고 있는 거대한 암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 시작하여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온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 <용과 주근깨 공주> 등 유수의 히트작들을 제작한 카와무라 겐키이지만, 그 흥행은 결국 감독들의 작가성과 맞바꾼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고들 이야기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아름다운 서정성은 <너의 이름은.> 이후의 자기 반복과 함께 무너졌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영화 <늑대아이> 등의 작품으로 감정과 관계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가성도 아름다운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중시하는 카와무라 겐키에 의하여 처참하게 무너졌다. TV 애니메이션 <데스노트>, TV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등 다크 판타지 장르의 여러 이야기들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던 아라키 테츠로 감독의 연출력도 영화 <버블>에서 카와무라 겐키에 의한 말도 안 되는 러브 스토리로 무너졌다. 카와무라 겐키로부터 자신의 작가성을 보존할 수 있었던 감독은 영화 <너의 색>에서의 야마다 나오코뿐이었다(사실 그녀는 교토 애니메이션 출신의 감독으로 제작자들의 간섭을 어떻게든 수용하면서 작품을 만들던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기는 하여야 한다. 또한 <너의 색>에서도 루이의 존재 등 카와무라 겐키식의 러브 스토리 간섭이 보이기는 한다. 감독 나름대로 자전화했을 뿐).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화는 상업성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인데, 돈을 벌어다 주는 프로듀서의 간섭이라면 결국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나는 카와무라 겐키가 싫다. 예술에 대한 윤리란,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겠지만 한 번 만들기 시작한 작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카와무라 겐키의 영화들은 포기한다. 러브 스토리의 세밀한 묘사를 포기하고, 감정과 관계를 어루만져야만 하는 이유를 포기한다. 결국 엉성한 이야기 위에서 의미 없이 아름다운 화면만이 지나갈 뿐이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정말 싫어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의 비판점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책임보다도 프로듀서 카와무라 겐키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할 정도로 카와무라 겐키의 프로듀스는 비윤리적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반문. ‘하지만 당신이 유일하게 호평한 나가이 타츠유키의 작품은 카와무라 겐키가 프로듀스한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나가이 타츠유키에게 작가성이 있다면 유일하게 보존된 작품이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일 것이라고. 프로듀서 카와무라 겐키의 특징은 어떻게든 작품 속에 러브 스토리와 판타지적인 사건을 집어넣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은, 정확하게는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 각본가 오카다 마리, 캐릭터 디자이너 겸 총작화감독 타나카 마사요시 트리오 ‘초평화 버스터즈’는 카와무라 겐키의 프로듀스를 이용해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바꾸어낸다. 작은 건물 정도 크기의 이공간과 현실 세계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적인 사랑 이야기로 세 사람은 프로듀서의 의도를 충족하면서도 설정의 과도한 팽창을 억제하고 왜곡되었을지언정 순수한 청춘으로 한 소녀를 성장시킨다. 그렇게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는 좋은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후레루.>에 이르러 세 사람은, 정확히는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은 무너지고 만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각본가 오카다 마리는 사랑의 욕망이라는 자신의 색을 연속적으로 드러내어 보이며 프로듀서에게 저항하는 듯 보이고, 타나카 마사요시의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는 언제나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결국 판타지는 주인공들의 관계 및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 후레루를 막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진다는 세카이계적 설정과 함께 비대해지지만, 정작 후레루와의 관계는 전혀 묘사되지 않은 채 싱겁게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비윤리적인 영화가 완성된다. 끝내 이전에도 좋게 보이지 않았던 감독은 더더욱 좋게 보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좀먹는 암 덩어리의 존재가 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후레루.>에서도 두 가지의 작가적인 시도가 보이기는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나가이 타츠유키 감독의 이전작 영화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성인 주인공 버전이라는 것이고(카와무라 겐키식의 고교생 판타지 감성에 잠식되기는 하지만), 두 번째는 초평화 버스터즈의 은유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주인공 쥰이 상처에 의하여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설정은 <후레루.>의 주인공 아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고, 다 함께 상처를 극복해 나간다는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세 명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깊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초평화 버스터즈 그 자체로 볼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레루.>를 감상하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후자를 선택하겠다. <후레루.>는 카와무라 겐키가 망치고 있는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극적인 초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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