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 한 명의 인간이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나로서는 드물게 호평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이었다. <어쩔수가없다>는 일종의 고백록처럼 다가오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존재는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만 인간으로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그렇게 남아있을 수는 있는 것인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후술할 두 편을 제외하면 그다지 인간적이지 않았다. 2020년대에 들어서야 박찬욱은 인간적인 감독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헤어질 결심>으로 사랑이라는 인간의 근원과도 같은 감정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어쩔수가없다>에서는 감독 자신의 취향과 공포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고백하며 부디 자신의 미래가 앞으로도 밝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미국에서는 해고를 ‘도끼질’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모가지’라고 한다. 2020년대에 이르러 박찬욱은 감독이라는 자신의 모가지를 도끼질하여 날려버릴 존재와 목도한 듯하다. 어째서 그는 인간의 존재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어쩔수가없다>를 꿰뚫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죽은 것은 단 한 명의 인간
<어쩔수가없다>는 주인공 만수가 경쟁자를 몰살하여 재취업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하지만 몰살이라는 단어는 과연 적합한 것일까? <어쩔수가없다>는 일종의 자살, 혹은 안락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설 자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대를, 남은 자리만이라도 사수하기 위하여 끝없이 경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남은 단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시대, 그것은 자살과도 같은 시대이다. 만수는 단 한 자리를 위하여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있는 사람들을 몰살한다. 그들은 일종의 분신이다. 같은 위치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며 비슷한 취미를 공유하다 끝내 같은 이유로 자리에서 쫓겨난 자들을, 분신들을 만수는 죽여야만 한다. 그렇기에 만수는 사람들을 몰살하면서도 고뇌한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수는 자신의 분신들을 살해하며 그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이탈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윽고 몰살을 완료했을 때, 만수의 가정에는 옅은 두려움, 죽음이 떠돌기 시작한다.
만수는 살아남았다. 이제 남은 것은 평화로운 안식일까?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패러다임의 교체라는 근본적인 원인 아래에서 만수 역시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사실상 만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모가지가 날아갔던 그 순간부터, 경쟁자들을 몰살하기로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가족들로부터 살인을 암묵적으로 동의받은 그 순간부터 만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쩔 수가 없다. 만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분재는 영원한 삶을 산다. 하지만 기존의 루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죽어버리고 만다. 만수는 자신의 삶을 분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루틴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삶. 하지만 시간은 흐르기에, 시대는 변화하기에 완벽한 삶이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흐름과 변화로 줄어든 자리, 단 하나의 어긋남으로 붕괴한 루틴을 되돌리기 위하여 행한 모든 것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재붕괴의 시한폭탄을 가동한다. 만수는 자신의 영혼을 살해했다. 가정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남겼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시대가 변화했을 때, 재붕괴의 시한폭탄은 폭발하여 만수의 육체마저 앗아갈 것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것은 단 한 명의 인간
이에 감독 박찬욱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끄집어내어 간절히 바란다. 부디 예술만큼은… 부디 예술만큼은… 기술은 완전 자동화를 이루었고 드디어 예술의 영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미 미술계와 음악계는 인공지능과의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영화계에 한정해 보아도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 매드 맥스 사가>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안야 테일러-조이의 어린 시절을 자연스럽게 그려내었고, 브래디 코베 감독도 <브루탈리스트>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헝가리어 발음을 교정하고 건축 도면을 그려내기도 하였다. 영화계에서 인공지능이란 지금은 보조 도구에 지나지 않고 불안정할 뿐이지만, 시간이 더 흐르고 시대가 더 변화한다면 인공지능만으로도 영화 한 편을 무리 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날이 도래할 것임은 자명하다. <어쩔수가없다>는 바로 이 시대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불안을 담은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미 예술의 절반은 잠식당하고 말았다. 흐름과 변화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전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데이터를 단 한 명의 인간이 상대하여야만 한다. 흐르는 시간과 변화하는 시대는 과연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나는 박찬욱 감독과 그의 영화들을 그다지 지지하는 편이 아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헤어질 결심>을 제외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영화는 단 한 번도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박찬욱이란 이전의 것들을 끌어모아서 대한민국이라는 국적만을 부여했을 뿐인, 아무런 오리지널리티 없이 텅 비어있기만 한 감독으로 인식되었고, <어쩔수가없다>를 호평하고 있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이번 영화로 추가된 박찬욱 감독에 대한 인식은 그가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 특이점을 주도하고 있는 어떤 존재와도 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수 초 만에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과 변화를 학습하여 결과물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는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박찬욱이란 부와 명성을 모두 거머쥔,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거머쥐지 못한 빈털터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공허한 자가 마주한 생명 없는 동족의 존재는 정녕 어쩔 수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