動, 同, 童
사실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를 리뷰할 마음은 없었다.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에 대비되는 불행하고 잔혹한 장면들의 충격으로 이야기와 주제를 이끌어가는 원작의 분위기가 특징 없이 움직이기만 할 뿐인 평범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영이 시작되자마자 생각은 단숨에 바뀌었다.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는 반드시 리뷰해야만 하는 작품이 되었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움직임, 작화이다. 좋은 애니메이션을 판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화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나는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를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을 뛰어넘는 미디어 믹스 작품을 발견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는 애니메이션만이 그려내고 담아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시청자에게 전달하면서, 끝내 원작을 뛰어넘은 걸작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만화 <타코피의 원죄>는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다.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알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타코피의 원죄>는 무지가 초래하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행복의 방법을 조금씩 알아나가는 이야기가 그려진 만화라고 생각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작가는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에 완전히 대비되는 불행과 잔혹의 이야기를 담아내어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주제를 이끌어나간다. 사실 그것은 작가의 오래된 특징이기도 해서, 과도한 자극을 추구하여 독자를 만족시키는 이른바 ‘불행 포르노’라는 비판 역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나도 작가의 특징에 대한 비판에는 여러모로 공감하는 편이다. 분량이라는 한계를 감안하고도 남주인공에게 수많은 불행 속성을 때려 박은 채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했다고 하는 여주인공과의 사랑과 관계를 생략해 버리면서 실제로 불행 포르노로 남고 말았던 작가의 전작인 단편 <키스하고 싶은 남자>라는 전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코피의 원죄>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불행하고 잔혹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이들을 조금 더 깊게 어루만지는 외계인 타코피의 존재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불행한 소년 노비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하여 미래에서 온 고양이 로봇 도라에몽의 이야기를 그리는 후지코 F. 후지오의 만화 <도라에몽>의 영향을 짙게 받은 타코피는 무지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만 할 뿐이지만, 모두를 웃는 얼굴로 만들어주겠다는 목표가 있다. 타코피가 자신의 원죄인 무지를 극복할 때마다 불행과 잔혹은 조금씩 사그라든다. 모두가 무지하지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혹은 함께 무지를 극복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불행과 잔혹의 굴레는 끝이 난다. 나오키에게는 준야가 있었고, 마리나와 시즈카에게는 서로가 있다. 타코피는 나오키와 준야로부터 깨달아 시즈카와 마리나에게 끝내 미소를 가르쳐 준다.
바로 이 지점, 시즈카와 마리나가 화해하고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하는 엔딩에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나에게는 ‘타코피의 사념만으로 시즈카와 마리나가 마지막 타임 루프에서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은 허무한 억지 해피엔딩이 아닌가?’라는 지적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도라에몽>의 마지막화로 기획되었던 에피소드 ‘안녕, 도라에몽’에서 노비타는 도라에몽이 떠나기 전 홀로 쟈이안에게 맞서 승리한다. 약골 노비타가 골목대장 쟈이안을 이긴다는 것은 평소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비타는 도라에몽이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버티고 버텨 쟈이안의 항복을 받아낸다. <타코피의 원죄> 역시 같다. 타코피의 존재는 사념이 되어버렸지만 잔향을 남긴다. 시즈카와 마리나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눈치챈다. 무지함에도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던 타코피와의 루프를 무의식적으로 눈치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는 그 모든 이야기와 주제를 화면 안에 담아내면서 진보하는 작품이었다. 애니메이션의 근원인 작화의 힘이 귀여움과 잔혹의 갭이라는 원작의 임팩트를 완전히 새로운 임팩트로 바꾸어낸다.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에는 끔찍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잔혹한 폭력이 아무런 여과 없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폭력 속에 담긴 인물들의 감정 역시 작화에 담겨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공포, 분노, 슬픔… 불행과 잔혹을 구성하는 감정들이 작화와 함께 움직여 온다. 시즈카 역의 우에다 레이나와 마리나 역의 코하라 코노미 두 사람의 훌륭한 연기는 이에 생명마저 불어넣는 마법과도 같았다. <타코피의 원죄> 속 작화와 연기의 융합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과 故 니시야 후토시 작화 감독의 영화 <목소리의 형태> 속 쇼야와 쇼코의 싸움 장면, 쇼야의 극단적 선택 시도를 알고 분노하는 어머니의 장면, 쇼코를 구타하는 우에노의 장면 등에 버금간다고 생각한다.
<타코피의 원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 지닌 감정이 어떻게 표출되고 변화하는가이다. 만화는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에 완전히 대비되는 불행하고 잔혹한 분위기의 차이와 이를 좁혀 가는 과정을 그려내어 표현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오로지 작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성우들의 연기만으로 표현한다. 사이토 케이이치로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 만화의 조잡한 정지 화상들을 작화만으로 아름답게 움직이도록 뒤바꾸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 역시 같은 지점에서 걸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만화 <타코피의 원죄>의 최대 강점은 정지 화상의 임팩트라는 만화의 오리지널리티보다도 ‘차이’였다. 애니메이션 <타코피의 원죄>는 정반대에 선 작품이다. 정지 화상의 임팩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움직이도록’ 만들고, 끝내 최대의 임팩트로 강조하여 그려낸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