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예인 병에 걸렸던 이유
당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방의 어느 대학에서 강연 초청을 받아 다녀온 적이 있다. 세션이 끝난 뒤 몇 명의 학생들이 따로 찾아와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쁘게 생긴 여학생이 싱글 생글 웃으며 내 개인 핸드폰 번호를 물어봤다. 제 연락처는 알려드릴 수 없고요, 대신 이메일 주소를 알려드릴게요.라고 하며 회사 이메일 주소를 적고 있는데 대뜸 “저희 삼촌이 매니저님 아신데요.”라고 말했다.
연고가 전혀 없는 지방이었기에 어머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 삼촌이 어떻게 저를 아신데요?라고 하니 연신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저희 삼촌이 매니저님이랑 사귀었데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매니저님 00동 살 때요, 그때 만났데요.”
난 여전히 당황한 상태로 구체적으로 내가 1년을 살았던 전셋집의 위치를 떠올리며 스쳐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렸다. 내가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느껴졌는지 그녀는 그 남자의 이름을 말했고 날 더 당황하게 했던 것은 도저히 그 남자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 그래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대였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사실 그 뒤에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안 봐도 뻔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여학생의 생글거리는 웃음을 떠올리며 혹시 내가 그 남자를 사귈 때 이상한 짓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술 먹고 깽판....)
직장마다 다르지만 공무원의 “품위유지” 조항처럼 “회사의 명성에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등의 내용이 취업규칙에 있다. 특히나 인사팀에 근무를 하면서 내가 하는 행동이 곧 회사를 대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데 면접 때 내가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지가 곧 그 회사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지는 것 등이 그 예시이다.
하지만 나의 사생활의 경우는 조금 많이 애매하다. 저 일을 겪고 30대가 되면서 소개팅이 아닌 만남에서 나는 직장 이야기를 하기가 굉장히 꺼려졌다. 예전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만난 남자와 3개월 이상 연애를 하는 동안에 이 남자는 내가 백수인 줄 알았다고 했다. 회사 이야기를 전혀 하지도 않았고 평일에도 나와서 운동을 하니 (난 주말근무를 하기 때문에 평일에 운동을 오래 한다) 내 마음 상할까 봐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남자를 사귀면서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닌데도 SNS에 회사 정보를 지우고 내가 어느 회사를 다니는지 누가 물어보면 머뭇거리게 되는 다소 심한 강박증상이 나타났다. 내 친구는 나에게 '연예인병'이라고 했지만 당시엔 꽤나 심각한 고민이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워졌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약간 '될 되로 돼라'의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지만 이 품위유지라는 것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예전에 외국인 매니저와 불륜을 저지른 직원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녀는 '사생활'이 왜 사내 징계 대상에 해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위법을 저질렀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도덕성에 대한 것이라면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회사에서 징계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어느 정도면 품위유지 조항에 해당이 되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내가 다니는 학교, 직장이 곧 내가 된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원자들에게 자기소개를 해 보라고 했을 때 대부분 자신이 나온 학교, 다녔던 직장으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어느 학교 출신이다, 어느 회사 출신이다로 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곧 그 학교와 회사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어디서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디까지가 용납이 되는 행동일까.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이탈리아인 매니저가 클럽에서 나 00 회사 매니저야 라고 자랑하면서 술 취해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 적이 있었다. 당시 클럽에 있던 여자 한 명이 인사팀 직원의 친구라 너네 회사에 00 매니저라는 사람 있냐며 물어보았고 결국 난 그 매니저에게 조심하라고 충고를 했는데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추행을 한 것도 아니고 사생활일 뿐인데 그것이 왜 문제냐, 나는 네가 어떻게 놀던지 상관없으나 회사 이름은 말하지 말라고 했고 그는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실 나도 그렇게 말할 권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직장인들이 모두 연예인병에 걸린 것처럼 살기 바라는 것은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