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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May 15. 2023

반가워! 여긴 지구별이야

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1

  “아빠 일 그만두고 제주도 갈 거야.” 두 아이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분주해진 눈동자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각자 살 궁리를 하고 있다. 다행이다. 부모에게 기대 살아가는 캥거루족이 아닌 것에 감사하다. 얼마 전 지나가는 말로 제주도에 가서 살 거란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름 말 잘 통하는 아빠라는 자부심이 있던 나였는데, 너무 일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안했다. 외국 같으면 벌써 독립할 나이라는 꼰대 같은 말은 하기 싫었다. 대신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약간의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딸이 스물다섯, 아들이 스물셋. 아직 어린것도 같고 다 큰 것도 같다. 스물다섯에 난 아빠가 되었고 딸과 처음 만났다. 그날은 내게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든 날이기도 했다. 출근한 지 꼬박 24시간이 지난 아침이 되어서야 퇴근했다. 피곤했지만 출산 예정일이라 아내와 여행을 가듯 짐을 싸서 병원으로 갔다. 산모는 금식해야 한다는데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난 너무 허기졌다. 마침 어머니께서 김밥을 사다 주셨다. 하지만 먹을 수가 없었다. 금식하는 아내는 얼마나 먹고 싶을까 하는 생각에 차마 먹지 못하고 있으니 그냥 먹으라고 한다. 망설이다 뒤돌아 하나를 냉큼 집어삼켰다. 입 안에서 번지는 시금치 향과 우엉, 햄과 단무지의 조합은 꿀맛이었다. 결국 옆에서 진통하는 걸 보며 김밥 한 줄을 다 먹었다. 나중에 이게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창밖의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11월 늦가을의 바람이 꽤 차갑게 느껴졌다. 갑자기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병실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진통이 점점 심해지고 배에 힘을 주는 건지 얼굴에 힘을 주는 건지 모를 정도로 온몸에 땀범벅이 됐다. 그야말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보는 내가 다 힘들 지경이었다. 직감적으로 곧 아이가 나올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간호사는 아직이라며 조금 더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나갔다. 본격적인 진통이 온 지 두어 시간쯤 흘렀을까?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분만실로 향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그 어떤 말도 위로나 응원이 되지 않는다. 그냥 입 다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다급히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하루 종일 산모들을 돌보느라 지쳐 보였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이었지만 걸음이 빨랐다. 어둡고 긴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나는 놓칠세라 다급히 따라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분만실로 보이는 곳의 문이 열렸다. 간호사의 안내로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가서 서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곳이다. 추웠다. 마치 커다란 냉장고 안에 들어온 것처럼 싸늘하고 오싹했다. 여러 개의 굉장히 밝은 전구들이 가운데 있는 분만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양쪽으로 다리를 올릴 수 있는 받침대가 보였다. 거기에 누워서 온몸이 땀에 젖어 안간힘을 주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께서 깊게 호흡하고 한번 더 힘을 줘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아내의 옆에 있으면 드라마처럼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힐 것 같다. 적당한 거리에 있어서 안심이 됐다. 얼굴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아내를 보았다. 내 주먹에도 힘이 들어갔다. 다리에서부터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면 아이와 만난다. 초음파 화면으로만 보던 내 아이를 드디어 볼 수 있다. 열 달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선생님이 커다란 가위를 들고 일어섰다. 난 영문을 몰랐다. 무슨 상황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산도(産道)를 절개했다. 그 순간이었다. 모든 장면이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가 보이고, 얼굴이 보이고, 팔과 몸이, 다리가 세상과 만났다.


  한참을 병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뚜렷하고 생생한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생각났다. 마치 피겨선수가 공중회전을 하듯 빙그르르 돌며 나오는 바람에 의사 선생님이 아이를 놓칠 뻔했다. TV에서 보던 장면과 달랐다. 아찔했다. 오직 내 기억에만 존재하는 장면이다.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내 심장에 와닿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이 났다. 혼신의 힘을 다한 아내가 애처롭고 고마웠다. 잠시 후 병실로 돌아온 아내의 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져 있었다. 몇 달 동안 보던 배가 아니었다. 지쳐 누워있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의 수고와 헌신을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작은 사람이라니. 바스러질 것 같아 조심스레 두 손으로 아이를 안았다. 팔을 움직이면 놀라기에 갓난아이는 꽁꽁 싸매어져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눈을 맞추며 서로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긴 여행 무사히 예쁜 모습으로 나에게 와주어 고마웠다. 대뜸 아빠라고 말해보라 했다. 옆에서 어이없어 피식 웃는 아내의 눈에도 별이 반짝인다. 여기쯤이 발인가? 발가락이 닮았는지 보고 싶었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린다. 울지도 않고 이렇게 얌전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가슴속에 다른 차원의 사랑이 가득 차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감동이다.


  반가워! 여긴 지구별이고 난 아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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