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홀로길에 May 24. 2023

지켜보지 말아 주세요

 글쓴이의 덧붙임 혹은 변명 1


‘입 안에서 번지는 시금치 향과 우엉, 햄과 단무지의 조합은 꿀맛이었다. 결국 옆에서 진통하는 걸 보며 김밥 한 줄을 다 먹었다. 나중에 이게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 반가워! 여긴 지구별이야 中



  첫 아이 이야기를 할 때면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저의 김밥 시식 사건이 언급됩니다. 물론 저를 놀리기 위함 이기도 하고 어디 가서 이야기 소재로 쓰기도 좋지요. 이런 건 애교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실수라도 하면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비슷한 경우를 경험해 보신 분 있을 거예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휴지 사 가자”

  “알았어”

  제가 담담히 대답하고 운전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외출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식당 음식이 이러니저러니 하며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 직전이죠.

  “내가 이럴줄 알았어.”

  “...뭘?”

  “마트 들려 휴지 사야 한다고 했지!”

  “...아차”


  잠시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짜증이 올라옵니다. 지나치기 전에 말을 해주면 될 일 아닌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억을 못 한 것이 화근이었지만 얼마든지 서로의 맘이 상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짚어내는 예리함보다 묵묵히 가려주는 다정함이 우리에게 더 필요해 보입니다. 일단 지적을 받으면 상대의 잘못은 없는지 찾습니다. 의식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뇌는 상대의 모든 데이터를 순식간에 살펴서 결국 찾아냅니다. 이제 무기가 생긴 거죠. 상대를 찌르고 사정없이 공격할 무기 말입니다. 정작 잘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찾아낼 데이터가 부족한 거죠.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가까울수록 더 무자비하고 아프게 찔러댑니다.


  그냥 웃으며 사과하고 넘어가면 될 일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럼 좋은데 몇 번의 시행착오로 그 대화의 끝이 예상됩니다. 전 말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맘에 담아두고 곱씹어 봅니다. 가능하면 내 안에서 녹아 없어지길 바라죠. 그래야 서로에게 좋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착각이었어요. 아물지 않는 상처만 늘어갈 뿐이었습니다. 답답하니 빨리 말하라는 핀잔은 덤이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보면 우린 앞에 있는 사람이 나의 말에 집중하고 공감하고 인정하길 원하잖아요. 그런데 저 역시 상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내가 원한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도 하죠. 사실은 왜곡되기 시작하고 본질은 흐려지게 마련입니다.


  살아오며 저에 대해 하나 깨달은 것은 너무 많은 생각으로 인해 오히려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분명 간단히 해결하고 좋은 상황으로 끝날 일을 점점 꼬아놓기도 하죠. 많은 생각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대화 혹은 상황에 대해 너무 멀리까지 가서 예상 시나리오를 써봅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돌발상황에 잘 대처하고 싶은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예상은 늘 비껴가고 화가 납니다. 표정에 나타나고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말투가 변하고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제 의도와는 정반대가 됩니다. 돌이키고 싶지만, 이상한 고집이 생깁니다. 망했습니다.


  얼마 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4년 동안 해오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작년쯤인가부터 제주도에 가서 살겠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주위 동료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네요. 하지만 막상 그만두기엔 두려운 것이 많았습니다. 결정을 내리기에는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겁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제주도에 내려가 살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일단 결정을 했습니다.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을 뱉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삶의 모습도 변하기 시작했죠.


  마음먹기 나름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전 저를 지키기 위해 마음 한가득 창과 방패를 준비했습니다. 상대의 공격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고 근심이 없어지니 똑같은 상황인데 제가 반응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게 됩니다. 제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구분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됩니다. 운전하다 보면 끊임없이 보이던 지적 거리가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제 행복의 주도권을 주고 싶지 않거든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온전히 즐기게 되었습니다.


  완연한 봄이네요. 새 출발 하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이전 01화 반가워! 여긴 지구별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