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2
“나가!”
유년기에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다. 지금도 진심으로 느껴진다. 정말 내가 나가길 바란 것 같다. 난 유치원을 다니기 전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질 않는다. 아주 작은 파편처럼 흩뿌려진 기억의 조각이 있을 뿐이다. 시골집, 할아버지, 고모들, 옆집 인식이 형, 응암동 골목, 주인 할머니, 내 동생이 태어난 날. 얼마 되지 않는 기억들 어디에도 엄마는 없다. 난 꽤 분주하고 활기찬 아이였음이 틀림없다. 많은 증언으로 알 수 있다. 성격 또한 날카롭고 까탈스러운 아이였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유전이 확실하다. 더군다나 할아버지와 고모들에게 키워져서 더 버르장머리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그해는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그때의 기억이 싫다. 뭘 얼마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두들겨 맞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와 같은 세대는 대부분-이라고는 하지만 나만큼 많이 맞은 사람은 드물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경험했다. 당시 신월동에 살았다. 남부순환로가 멀리 보이는 곳이었다. 골목을 나서면 허허벌판이었다.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아니 적막했다. 도로 건너편엔 판잣집이 한 채 있었는데, 마귀할멈이 산다고 어른들이 얘기했다. 아마 아이들이 도로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나 보다. 해가 저물어 가면 벌판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던 벽돌조각들과 잡초들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쯤이면 내 얼굴도 벌겋다. 최선을 다해 놀았다는 증거다. 돌아갈 시간이다. 집에 가는 게 싫었다.
부부싸움, 그리고 매질. 나의 유치원 다니던 일 년의 기억이다. 물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그랬다. 어느 날 주인집이 미국에 이민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김포공항-79년 당시엔 모든 국제선이 김포공항에서 운항되었다-까지 환송하러 갔다. 따라가고 싶었다. 나랑 동갑내기 딸이 너무 부러웠다. 그 무렵부터 나는 혼자 미국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허리에 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며 인디언을 피해 금발의 미녀와 사랑을 하는 상상. 난 미국이 서부영화에 나오는 사막처럼 생긴 줄만 알았다. 어차피 내 머릿속인데 뭐 어떨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난 다시 응암동에 있는 외삼촌 댁에 맡겨졌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외삼촌은 매우 엄하셨다. 온통 안되는 것투성이였다. 숨만 쉬어야 했다. 마당에서 뛰어선 안 되고 소리도 크게 내면 안 됐다. 난 8살이었다. 그 집 입구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매일 보지만 나에게는 짖었다. 대문을 지나는 게 너무 무서웠다. 묶여는 있었지만, 정말이지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했다. 아침에 학교에 가야 하는데 짖어대는 그 개가 무서워 대문 앞에서 운 적도 있었다. 그러면 외할머니께서 개를 막고 문을 열어주곤 하셨다. 나에게 그 대문은 지나가야 하지만 지나가기 싫은 무력감과 상실감을 주고 있었다.
일 년쯤 아니 조금 더 지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시 부모님과 남동생,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는 유일하며 온전한 내 편 이셨다. 여러 명의 손주가 있었지만, 할아버지 무릎은 내 차지였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왕좌였다. 감히 도전하는 자가 없는 굳건한 자리. 난 할아버지와 있으면 매우 안전함을 느꼈다. 엄마의 잔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신의 영역. 성스럽고 영광된 시간. 한겨울 새하얀 광목천을 새로 입힌 두툼한 솜이불을 턱밑까지 올려 덮고 있으면 전해져 오는 묵직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겨보고자 버텨도 이내 스르륵 잠들 수밖에 없는 포근함과 안정감.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랬다. 그런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나의 영원할 줄 알았던 울타리가 쓰러졌다.
엄마와 친해지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감정의 폭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편차가 컸다. 어린 나는 이내 포기했다. 죽기 살기로 버텨보자고 나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10살이었다. 그랬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요즘 같으면 아동학대로 뉴스에 나올 법한 일들이 나의 일상이었다. 난 내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특히 나에게 저녁 식사 시간은 외갓집 대문을 지키던 그 개를 지나가야 하는 순간처럼 느껴지기 일쑤였다. 비위가 약했던 나는 돼지고기 냄새를 싫어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참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저녁상에 돼지불고기가 반찬으로 나오면 이내 긴장했다. 여지없이 헛구역질은 나왔고 반짝거리는 은수저가 내 이마를 강타했다. 이번엔 아빠의 은수저였다.
괜찮아. 십 년만 참으면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