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 - 라라소나 28km
새벽 6시가 되니 여기저기 준비하는 소리에 자연스레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대부분 수비리까지 이동하는데 난 그곳에 숙소를 예약하지 못해 5km를 더 걸어 라라소나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 조금 일찍 출발하려고 서둘러 준비했다. 다행히 밤새 신발과 옷이 다 말랐다. 비가 왔는지 땅이 촉촉이 젖어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까미노 화살표를 찾아본다. 노란색 조개 모양을 따라가면 된다. 대략 800km의 여정 중에 어제 24km를 걸어왔으니 이제 776km쯤 남았다. 얼마 안 남았네. 라고 생각하며 정신 승리를 해본다. 아! 까마득하군.
처음부터 울창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해가 났는지 비가 오는지도 모를 우거진 숲 터널이 이어졌다. 제주 올레길에도 이런 분위기의 길이 있었다. 키가 큰 북유럽계 사람들은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인사를 나눈다. ‘좋은 순례길 되세요.’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나중엔 습관처럼 말하게 된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오늘 길도 절대 수월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걷다 보니 길에 피어 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들꽃이 시선을 끌었다. 빨간 그 꽃은 색깔부터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한 한국인께서 양귀비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양귀비? 그럼 혹시? 다행히 이름만 같고 다른 꽃이라니 다행이다.
늦은 점심 무렵 수비리에 도착했다. 저 돌다리를 건너면 쉴 수 있는데 난 5km를 더 가야 한다. 한 시간 남짓 더 걸으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아직 몸이 걷는 데 적응하지 못한 데다가 피레네를 넘은 피로가 쌓여있었던 것을 간과했다. 통증이 없었을 뿐 몸은 아파하고 있었다. 불과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무릎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나타난 돌밭인 내리막길. 등산스틱에 의지해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널기 위해 마당으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릎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큰일이었다. 이제 이틀 됐는데. 덜컥 겁이 났다.
침대에 걸터앉아, 가지고 있던 파스를 붙이고 또 바르고 나서 누웠다. 움직이는 것도 힘겨웠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침에 괜찮아지려나? 더 나빠지면 어쩌지? 병원에 가야 하나?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가만히 누워있으니, 걱정만 쌓여갔다. 이대로 있을 수 없어서 가지고 있던 반창고 여러 개를 무릎에 감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어떻게 온 스페인인데.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다들 무릎보호대 하나씩은 챙겨 왔던데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냥 왔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걸어 본 적도 없으니, 뭐가 필요한지 어떤 문제가 생길지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Tip. 생장(혹은 오리손), 론세스바예스, 수비리는 한국에서 출발 전 예약하길 권한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수비리에 빈 침대가 있었다. 일부 알베르게는 예약 외에 여유분의 침대를 마련해 두는 곳이 있다. 가고자 하는 데 예약이 다 찼어도 규모가 있는 마을이라면-부엔까미노 앱에 그 마을에 있는 침대의 개수가 대략 나온다-직접 가서 알아보자. 언어가 된다면 전화를 해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도 침대가 없다면 택시를 불러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