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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를 오르다

생장 - 론세스바예스 24.2km

by 나홀로길에

어제부터 오던 비는 아침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부산에서 오신 나보다 열 살 많은 형님은 이미 출발하셨는지 침대가 비어 있었다. 7시가 넘어가니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아침까지 챙겨 먹은 후 8시가 되어 알베르게를 나섰다. 마을을 벗어날 때쯤 커다란 순례길 안내도가 나타났다. 왼쪽 나폴레옹 길을 따라가면 된다. 우의를 입을까? 망설이다 그냥 걸었는데 출발한 지 10분 정도 지나니 비가 그쳤다. 다행이었다.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날이 밝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대략 8km를 더 올라가야 오리손이라는 산장쉼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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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를 오르는 동안 길옆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한국과 산의 모습이 달랐다. 나무보다는 풀이 많고 소나 말, 양이 드넓은 들판에 자유롭게 있었다. 계속된 오르막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침을 가볍게 먹는 것이 나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조식으로 준비되어 있던 토스트가 생각났다. 하나만 더 먹을걸. 얼마 남지 않은 오리손 산장에서 요기해야겠다 생각하고 조금 속도를 냈다. 그때 길 한쪽에 쉬고 있는 한 사람. 그냥 봐도 한국인 청년 같았다. 서로 인사를 하고 잠시 땀을 식히며 그의 배낭을 내려다보니 꽤 커 보였다. 무게를 물어보니 20kg. 필요하다 싶은 건 다 가져왔다고 했다. 심지어 텐트까지. 난 저 정도 무게의 배낭을 짊어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 젊어 고생은 사서 하는 거지.


오리손 산장에 도착해서 메뉴판을 보니 하몽 샌드위치가 4유로다. 주문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카드를 받지 않는다. 현금만 받는다고 한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내 수중에 있는 건 오직 3.5유로였다. 현금이 모자랐다. 사정을 해봤지만 안된다는 대답뿐.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현금을 찾지 못한 데다가, 어제는 비가 너무 많이 와 오늘 아침 ATM에서 현금을 찾아 출발하기로 했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배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주문하던 프랑스인 아주머니가 내게 0.5유로를 선뜻 건넸다. 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몇 번이고 메르시를 외치며 하몽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지갑을 흔쾌히 열어준 그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 아버지와 어린 아들, 친구와 같이 온 사람, 조용히 혼자 걷는 나 같은 사람들. 참 다양한 사람들이 피레네의 끝없는 오르막길을 힘겹게 걷고 있었다. 오늘 넘어야 하는 해발 1,400m의 피레네는 오르는 내내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넘자마자 맞닥뜨렸던 엉망진창인 진흙탕 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조심조심 다른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디뎌 밟고 아슬아슬 지나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발목까지 빠져드는 진창길을 만났다. 잠시 멈춰 섰다. 신발은 진흙으로 엉망이 될 거고 양말뿐 아니라 바지까지 젖을 게 뻔했다. 어떡하나 생각하는데 답이 없었다. '아니야, 고민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내디뎌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불편하고 찝찝하겠지만 더러워진 것은 씻어내면 된다.'


이번엔 끝없는 내리막이었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했다. 내려오는 내내 비구름 속을 걸었다. 물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내려오다 만난 미국인 아이 유다는 엄마를 뒤로한 채 뛰어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샌들을 신고 말이다. 어린이의 저 끝없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부러웠다. 스페인 땅을 밟은 지 몇 시간이 흘러서야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11시간을 걸었다. 쉬었던 걸 감안해도 10시간은 족히 걸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씻고 나니 저녁을 먹어야 했다. 식사 후 다시 침대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니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날이 앞으로 한 달 남짓 있을 예정이다. 많은 생각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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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내려다보며, 삶에 지쳐 고단했던 지난날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늘 앞에 있는 문제를 바라보며 피해 갈 방법을 찾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는 게 다 그렇다며 스스로 위안하고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오길 오십 년. 책임에 대한 무게감이 어깨를 누를 때마다 도망치듯 살았다. 그렇게 물 흐르듯 사는 것이 마치 잘 사는 것처럼. 피레네의 진창길을 건너며 난 깨달았다. 지금 내딛는 작은 한걸음이 모여 결국 목적지로 나를 데려다준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했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Tip. 첫날을 오리손 산장에서 머물면 피레네를 넘기가 훨씬 수월하다. 인터넷으로 산장 예약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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