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소나 - 팜플로나 15km
창밖 산 너머로 해가 붉게 올라오고 있다. 무릎은 여전히 아프다. 다행인 건 오늘 가야 하는 팜플로나까지 15km만 걸으면 된다. 빠진 것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심스레 알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호스트가 준비해 준 아침 도시락을 집어 들고 길을 나섰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굳었던 근육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욱신거린다. 그래도 걷다 보면 몸이 적응하겠지.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져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반드시.
스페인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도시에 왔다. 팜플로나. TV에서 흰옷을 입고 허리에 붉은 허리띠를 한 채 소를 피해 도망가는 축제를 봤다면 이곳 팜플로나일 가능성이 높다. 스페인의 소몰이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도시로 팜플로나, 에스텔라, 사하군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나름 도시라 꽤 규모가 있다. 외곽에서 공립 알베르게까지 천천히 두 시간은 걸은듯하다. 신호등 있는 건널목을 꽤 많이 지나야 해서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파리도 그러더니 이곳 스페인 사람들도 무단횡단이 일상적이다.
알베르게는 도시 성곽 안쪽 구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성당 가운데를 이층으로 개조해 많은 사람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했다. 돔으로 된 천장은 전체가 뚫려있어 말소리와 각종 소음의 울림통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조금 소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이곳은 샤워장과 화장실이 남녀공용이었다. 처음 마주하는 광경에 다들 조심스러웠다. 특히 남자들이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안을 들여다보면 샤워타월 하나 걸치고 돌아다니는 여자도 있고, 아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을 봤다는 목격담이 난무했다.
한국에서 만날 수 없는 광경들로 당황했지만 이건 시작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아픈 무릎을 위해 보호대를 사기로 했다. 마침, 근처 순례자 용품점에 괜찮은 제품이 있어 샀다. 바로 착용을 하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팜플로나는 마치 내가 중세 시대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틈 없이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과 돌로 된 길, 좁지만, 층마다 있는 예쁜 발코니, Bar에 앉아 커피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 광장을 둘러싼 Bar의 테라스 좌석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광장과 Bar를 사랑한다.
PS. 이들의 무단횡단을 보며 형편없는 시민의식에 실망했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무단횡단은 날 당황케 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 보니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됐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으면 지나가던 차는 무조건 일시 정지를 했다. 내가 길을 찾기 위해 휴대전화를 보다가 차가 기다려주고 있는 것을 알고 먼저 지나가라고 했는데, 다시 한번 나에게 손짓한다. 먼저 지나가라고. 처음엔 그 사람만의 행동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정말 모두가 그랬다. 불현듯 비행기에서 프랑스인 셀세비가 한 말이 생각났다. 한국은 너무 아름답고 살기 좋은데 보행자를 위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 이들은 사람이 우선인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보행자를 우선시하는 이들의 작은 행동을 보며 최소한 이 부분은 선진국임을 인정했다. 시스템이 편리하고 효율적인 한국의 도로에서는 보행자나 자전거를 탄 사람은 불편하고 피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나 역시 ‘도로에서는 차가 먼저’라 생각했다. 물론 스페인에서도 교통사고가 나고, 과격하게 운전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우선하는 이들의 모습은 배워 마땅해 보인다.
Tip. 사용해 보니 밴드형 무릎보호대보다는 위아래가 찍찍이로 되어있는 제품이 효과적이다. 그런 제품이 너무 투박하고 불편하다면 얇은 슬개건 보호대도 좋은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