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 - 우테르가 17.3km
팜플로나의 아침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거리 곳곳에 물청소하는 모습이 보였다. 스페인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밤부터 새벽까지 물청소를 한다. 덕분에 뜨겁고 건조했던 공기가 상쾌해졌다. 스페인의 여름은 한국과 다르게 강수량이 적고 건조하다. 게다가 지대가 높고 공기가 맑아서인지 태양의 열기가 더 뜨겁다. 대신 그늘에 있으면 거짓말처럼 시원함을 느낀다. 이른 시간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까미노 표식을 따라 배낭을 멘 사람들의 뒷모습이 거리에 가득했다.
아직 도심을 채 벗어나기 전인데 출발하며 마셨던 스포츠음료 탓인지 화장실이 급해졌다. 큰일이다. 스페인은 공중화장실이 거의 없다. 이른 아침이라 문 연 Bar도 없다. 참고 조금 더 걸어보지만 금세 한계에 다다랐다. 주위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건물이 보였지만 차단기가 내려져 있다. 그때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번역기를 통해 화장실이 근처에 있는지 물어봤다. 잠시 휴대전화를 응시하던 그 사람은 나에게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차단기가 내려져 있는 그 건물로 따라 들어갔다.
난 얼떨결에 신원확인을 두 번이나 해야 들어갈 수 있는 팜플로나 대학교 연구동 화장실을 이용했다. 마침, 그곳 직원에게 말을 걸었고,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 ‘그라시아스’를 연신 외치며 살 것 같은 표정으로 건물을 나섰다. 스페인 사람들 대부분 나처럼 배낭을 멘 순례자에게 더 친절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져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도심을 완전히 벗어나니 그림 같은 풍경들이 펼쳐졌다. 컴퓨터 배경 화면에서 보던 장면이다. 경치에 취해 걷다 보니 문득 무릎의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들판 저 멀리 산 위의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돌고 있었다. 저곳을 오르려나? 나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땀을 잔뜩 흘린 채 풍차 바로 아래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정상에 가까워졌음을 느낀 나는 힘을 내 발걸음을 옮겼다. 구불구불 좁은 길을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철제 조형물이 보였다.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도대체 누가 언덕이라고 불렀는가. 해발 740m 높이에 있는 용서의 언덕은 순례길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실 난 여기에 있는지 모르고 올라왔다. 그런데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스페인에 와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기쁨도 잠시, 이제 내려가야 한다. 무릎 보호대를 다시금 단단히 고쳐 매고 조심스레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계획은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가야 했지만 무릎 상태를 생각해서 ‘우테르가’라는 작은 마을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자갈과 거친 돌바닥으로 된 길이 더욱 내 무릎을 힘들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내려가 쉬고 싶었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다. 다 내려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상당수의 사람이 이번 내리막에서 무릎에 무리가 왔다고 말했다.
PS. 순례길 계획단계부터 기간을 여유 있게 잡자.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눈과 마음에 담고, 같이 걷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하자. 나중에 기억나는 건 새로 사귄 외국인 친구다. 물론 영어공부도 미리 열심히 해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