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테르가 - 비야투에르타 24.9km
몸이 적응하는 건지 무릎 보호대 덕분인지 통증은 이제 사라졌다. 그래도 무리하지 않고 며칠간은 조심해야겠다. 오늘 한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다행히 길이 평탄한 편이었다. 고도계를 확인해 보면 내일까지는 계속 평지임을 알 수 있었다. 출발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푸엔테 라 레이나를 지났다. 팜플로나와 분위기나 모습이 매우 비슷했다.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마치 유적지를 지나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 길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니, 문화재는 맞다.
로르카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테르가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쉬기로 했다며 더 걸어야 하는 나에게 맥주 한 잔을 사주었다. 시원한 맥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쉽지만, 그와 인사를 하고 다시 출발하려고 배낭을 둘러멨다. 그때 피레네부터 알게 된 한국인 동생 찬웅이-배낭 무게 20kg의 주인공-급히 나를 찾았다. 이 마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뜨끈한 커피만 마시다가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살맛 났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속도와 거리, 몸 상태가 조금씩 변화하며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사람들을 봤는데 어느샌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늘 도착한 비야투에르타엔 알베르게가 단 하나였다. 이층 침대 여덟 개. 슈퍼마켓 하나에 Bar도 두 개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군데는 일찍 닫아 영업이 종료된 상태였다. 마을 구경도 할 겸 천천히 둘러보는데 십 분 만에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주방엔 몇몇 사람들이 분주히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되도록 사 먹기로 했다. 혼자여서 먹고 남은 재료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부담이고 뭘 해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걷는 데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 삼아 오늘도 사 먹기로 한다. 고민할 것도 없이 문을 연 유일한 Bar에 들러 메뉴 중 가장 앞에 있던 수제버거를 맥주와 함께 시켰다. 그런데 이 버거 너무 맛있었다. 의외의 맛집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한 부부가 들어왔다.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다. 그런데 호스트가 나에게 오더니 부인께서 다리가 아프니 침대 아래층을 양보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나도 무릎이 아프다며 거절했다. 겨우 진정된 통증이 다시 나를 괴롭힐까, 걱정도 됐다. 다행히 다른 침대 아래층에 있던 이십대로 보이는 친구가 숙소로 돌아왔고 그가 흔쾌히 양보했다. 하지만 난 그 일로 인해 밤새 잠을 설쳤다.
PS. 침대를 양보하지 않은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잘 때만 침대 이층에 올라가고 깬 다음 내려오면 되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데, 그냥 양보할 걸 그랬나? 계속되는 생각에 누워있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양보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네덜란드 사람이었던 그녀는 나의 말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그렇게 말해줘 고맙다고 말하며 날 살포시 안아줬다.
Tip. 우테르가에 이어 비야투에르타까지 연속으로 작은 마을에 머물렀는데, 볼 것도 없고 뭘 살 데도 없어 불편하다. 굳이 조용한 데를 찾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큰 마을의 숙소를 잡을 것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