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투에르타 - 로스 아르코스 25.4km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마을을 떠날 수 있었다. 알베르게를 나서니 시원한 바람이 나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했다. 해는 이미 떠올라 밤새 차가워진 공기를 데우고 있다. 한 시간쯤을 혼자 걸어 에스테야에 도착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성당과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시내를 통과하는데 느지막이 출발하는 순례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냈다. 시내를 거의 벗어날 때쯤 나타난 슈퍼마켓에서 갓 구운 빵과 콜라 하나를 사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한국에서 보고 들은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막상 눈앞에 나타나면 아! 이게 여기였구나! 하며 생각이 난다. 이라체 수도원 직전에 나타나는,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도 그랬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한 외국인 무리가 철문 안쪽에서 뭔가를 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궁금해진 난 가던 길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갔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와인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행동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나에게도 맛보라며 권하는 말에 컵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이란 작은 마을을 지나면 로스 아르코스까지 12km인데,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걸어야 한다. 난 한참을 걷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정도면 마을이 나올 법한데 하며 걷기를 두 시간 남짓. 그늘도 없는 그 길은 오른쪽으로 끝없는 누런 밀밭이, 왼쪽으로는 짙은 녹색의 청보리밭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져간 물도 거의 바닥인데 큰일이었다.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조그마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난 잠시 쉬어갈 생각에 기뻤지만, 도착해 보니 앉을 자리도 없는 그곳에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뜨거운 태양을 잠시 피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검색하면 나오는 곳 중에 아무것도 없는 이 허허벌판이 가장 힘든 곳 중 하나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였던 이 길은 나를 비롯한 순례자 대부분의 발바닥을 뜨겁게 달궜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걷는데 작은 팻말이 보인다. 전방 1km 앞에 푸드트럭! 갑자기 힘이 났다. 빨리 가서 얼음이 잔뜩 들어간 차가운 콜라를 마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만난 푸드트럭 ‘오아시스’. 이름처럼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모두 환호하며 푸드트럭에 왔다. 순례자를 위해 의자와 테이블을 여러 군데 설치해서 편히 앉아 쉴 수 있었다. 30분쯤 쉬고 다시 힘을 내 걸었다.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로스 아르코스는 성당이 자리한 작은 광장에 슈퍼마켓과 Bar가 있어서 그런지 이미 도착한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침대가 충분했던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마치고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나서는데, 생장과 론세스바예스에서 같이 있었던 부산 형님을 다시 만났다. 그날 밤 나와 부산 형님을 비롯한 한국인 몇 명은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며 그동안 하지 못하던 말들을 쏟아냈다.
PS. 왼쪽에는 와인이, 오른쪽에는 물이 나오는 공동수도는 이라체 와인을 생산하는 회사에서 제공한다고 들었다. 나는 컵이 없어 손사래를 쳤지만, 컵이 없는 대다수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와인을 입으로 받아 마셨다. 나도 그렇게 마셔봤다. 물론 수도꼭지에 입을 댄 건 아니다. 와인은 상당히 맛있었다. 볼에 흘러내리는 와인을 손으로 훔쳐내고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은근히 술기운이 올라왔다. 오전 내내 술기운 덕분에 힘이 났다. 때로는 그 공동수도에서 와인을 텀블러에 받아 물 대신 마시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순례자가 술례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Tip. 마을이 있어도 Bar가 문을 닫아 영업하지 않는 곳도 있으니, 초코바나 작은 빵 같은 간식거리를 항상 준비해 두자. 물도 충분히 준비하자. 난 필터가 달린 물통을 사 갔는데 아주 유용했다. 유럽은 수도꼭지나 공동 수도에서 나오는 물이 석회수다. 매번 사 먹는 것이 부담된다면 필터가 달린 물통 하나 사 가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