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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Aug 07. 2024

노숙자와 동침하다

로스 아르코스 - 로그로뇨 28km


갈수록 낮 기온이 오른다. 정오가 넘어가면 태양이 너무 뜨거워 빨리 지치는 걸 느낀다. 그래서 다들 일찍 일어나 출발하는 거였다. 성격 급한 한국인이라 서두르는 게 아니었다. 국적 불문 모두 일찍 출발했다. 나 역시 오늘은 서둘러 채비하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인 로그로뇨까지 거리도 멀었다. 새벽공기는 아직 차가웠기에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출발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자 더워지기 시작했다. 불과 한 시간 만에 점퍼를 벗어 던지고 말았다.



산솔이라는 마을에 도착해서 잠시 쉬는데 한국인 한 분이 인사를 한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뵌 분이었다. 일 년 동안 안식년을 맞이한 신부님이라며 어제 부산 형님께서 소개해 주셨다. 오랜 사제 생활 동안 처음으로 쉬어 본다는 그 분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보살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번 순례의 목표가 자신을 사랑하기라고 하셨다. 어쩌다 보니 신부님과 로그로뇨까지 동행하며 서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그로뇨는 순례길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큰 도시다. 특히 ‘타파스’가 유명하다. 조그마한 접시 하나에 올라갈 정도의 간단한 음식을 일컫는데 보통 맥주와 함께 간식으로 즐기는 편이다. ‘타파’ 여러 개를 모아 ‘타파스’인 셈이다. 그중 양송이 타파스가 유명하다. 블로거나 유튜버들을 통해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 외 수많은 종류의 것들이 골목을 다니다 보면 눈에 띈다. 먹어보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난 여기에서 하루 더 쉬기로 했다. 첫날은 호텔에서, 다음 날은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호텔에 도착한 나는 간만에 혼자만의 공간이 생겨 좋았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니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르신들이 왜 그렇게 온천을 좋아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졸음이 오고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뷔페가 있다며 같이 가보자는 찬웅이의 연락이었다. 난 흔쾌히 그러자 했다. 그동안 먹는 것이 대단히 만족스럽지는 않았기에 나름의 기대를 하며 갔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메뉴들이 많아서 우리는 먹기도 전에 신이 났다. 정신없이 허겁지겁 접시를 비워냈다. 순례길을 걸으며 오늘처럼 이렇게 많이 먹은 건 처음이었다. 낼은 걷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쉴 것이었기에 더욱더 마음 편하게 먹었다.



만족스러운 만찬을 끝내고 나와보니 온 도시가 노란 불빛들로 가득하다. 건물들과 가로등의 불빛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로그로뇨의 야경을 즐겼다. 그러다 난 호텔로 찬웅이는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내일은 같이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머물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호텔로 돌아와 창밖에 펼쳐진 야경을 보며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데 배가 부른 데다 조용한 호텔 방에 혼자 있으니 졸리기 시작한다.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았는데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찬웅이였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메시지를 남겼다. 알베르게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난 바로 전화를 걸었다. 문 닫는 시간이 밤 10시인데 3분이 늦어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베르게로 전화했는데 스페인어로 혼자 몇 마디하고 끊어버렸다고 한다. 밖은 바람이 불기 시작해 꽤 쌀쌀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찬웅인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심지어 배낭이며 모든 짐이 알베르게 안에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내가 있는 호텔로 오라 했다.


찬웅이가 호텔에 도착했지만, 여권이 없는 상태였다. 리셉션에 가서 사정을 얘기했는데 여권이 없으면 안 된다는 답변뿐이었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오래전 여권 사진을 찍어둔 것이 있다며 급히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 사진을 보여주고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난 더블 침대 하나를 예약했지만, 싱글침대 두 개를 붙여놓았던 객실이었는데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 됐다. 온전히 혼자 즐기려던 이 밤은 까미노에서 만난 한국인 동생과 느닷없는 동침으로 마무리됐다.  



PS. 비행기를 탄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야깃거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삶도 그렇다. 계획된 대로 되지 않고,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놓인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나의 태도와 기분이 달라진다. 동행했던 신부님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여행을 결심했듯이, 나 역시 나를 짓누르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털어내고 긍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갈 데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찬웅이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잘될 거란 막연한 믿음이 오히려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는 것을.


Tip. 로그로뇨에서 연박을 계획하는 사람이 많다. 출발한 지 일주일이 지나 피로가 쌓일 때쯤 하루 쉬어가는 것이 남은 길을 더욱 힘 있게 걷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나 같은 경우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에서 하루씩 쉬었다. 가능하다면 일정을 여유 있게 잡고 중간중간 쉬어가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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