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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Aug 08. 2024

조용히 걷고 싶다

로그로뇨 - 나헤라 29.6km

로그로뇨에서 맞이한 두 번째 날은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쉬었다. 기부제 알베르게란 숙박 요금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각자 형편에 맞게 기부 상자에 돈을 넣으면 된다. 물론 기부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런 곳은 대부분 천주교 지역 교구에서 관리하고 운영을 한다. 일하시는 분들도 봉사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시설이 열악하지도 않다. 어쩌면 순례길에서 만나는 숙소 중에 괜찮았던 곳은 기부제 알베르게가 많았다. 걷기를 멈추고 느긋하게 구경하며 이틀을 쉬어서인지 몸이 가뿐했다.



오늘 가야 할 나헤라에는 공립 알베르게에 있는 침대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사립으로 운영되는 곳은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다. 걸어야 할 거리도 30km나 되어서 아침부터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로그로뇨를 빠져나가는 길 어귀에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이미 시작되었다. 도시를 벗어나자 커다란 호수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보였다. 드리운 낚싯대보다 휴대전화에 정신을 빼앗겨 혼자 웃는 할아버지를 지나니 오르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점퍼를 벗을 때가 됐다.



그늘이 없는 길을 계속 걷고 있으니,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몸은 걷고 있는데 정신이 몽롱해진다. 걸으며 졸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런 기분인가 싶다. 멍한 나를 깨운 건 시끄럽게 조잘거리며 나를 에워싼 스페인 초등학생 무리였다. 그저 몇 명이 걷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백 명은 족히 넘는 수의 학생들이 앞뒤로 같이 걷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자꾸 내게 말을 건다. 아마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묻는 거 같았다. 난 ‘꼬레아’라고 답했다. 듣고 싶던 대답이었는지 자기들끼리 웃으며 ‘BTS’라고 소리를 질러댄다.



이 아이들과 같이 걸은 지 30분이 지났다. 더는 무리라 생각되어 잠시 쉬기로 했다. 아이들의 끊임없는 목소리와 정신 사납고 분주한 움직임들은 나를 빨리 지치게 했다. 내가 풀밭에 멈춰 서자,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하나둘씩 내 옆으로 왔다.  그때 누군가가 소풍 나온 아이들이라 얘기해 줬다. 스페인은 소풍도 순례길로 오는구나. 한국에서 소풍을 왕릉으로 가는 거나 별 차이 없을 듯하다.



나헤라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이번엔 중학생들이 나에게 뛰어와 뭐라고 얘기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영어 같기도 하다. 그때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자신을 교사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영어 수업 중이고 순례자에게 영어로 질문을 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잔뜩 기대하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 사항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학생의 더듬거리는 영어를 듣고 더듬거리며 답변해 줬다. 서로 원하는 질문과 답변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족스러운 인터뷰(?)를 마치고서 난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알베르게 도착하니 이미 줄이 넘치도록 서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침대의 개수와 세워져 있는 배낭을 비교해 보니 간신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뒤로 열 명이 채 들어가지 못했으니 아슬아슬했다. 짐을 정리하고 알베르게 앞에 흐르고 있는 강에 다들 발을 담그러 갔다. 물이 너무 차가워 오랫동안 담글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로 인해 지치고 힘든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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