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20.9km
분주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미 빈 침대가 많은 걸 보니 다들 일찍 출발한 모양이다. 오늘도 대부분 그늘이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더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려고 다들 일찍 출발한다. 나도 서둘러본다. 약간 쌀쌀했지만 얼마 안 가 벗을 점퍼는 배낭에 넣었다. 이제 몸이 적응하는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지 않다. 걷는 것도 확연히 덜 힘들다. 서두르지 않고 쉬면서 가면 누구나 갈만한 길이다.
시작부터 언덕이었다. 그리 높지 않았지만, 아침에 만나는 언덕은 힘들다. 그래도 서로 웃으며 인사하는 여유가 있다. 하지만 태양과 씨름하고, 자갈길에 발이 붓기 시작하면 여긴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이 길을 왜 오고 싶어 했는지, 정말 오고 싶어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다 문득 왜 걷고 있는지 나에게 질문을 해본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에게 왜 이 길을 걷는지 자주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됐다고 둘러댄다.
내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자신도 실력도 없어, 그렇게 둘러 대지만, 사실 나도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스페인식 이름이 산티아고-가 스페인 갈라시아 지방까지 복음을 전했고,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한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묻히게 되었다. 그의 무덤 위에 현재의 대성당이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천주교 혹은 기독교인이 이 길을 찾는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처음부터 종교적인 의미로 이 길을 걷고자 한 건 아니었다. 오래전 우연히 이 길을 알게 됐고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다. 나의 남은 순례길 여정이 끝나기 전에 깨닫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내 눈앞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며 복잡한 생각을 한순간에 떨쳐냈다. 사진으로 보던 그곳이다. 그래 일단 내 눈에, 내 마음속에 담자. 건조한 바람, 태양의 열기, 푸른 평원, 파란 하늘,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산토 도밍고는 시 외곽에 물류회사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보기 힘들던 대형 트럭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외곽과는 다르게 옛 모습이 잘 보존된 전형적인 스페인 마을이었다. 알베르게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었고, 어김없이 Bar의 테라스가 보였다. 그곳에서 직접 만들어 판매하던 바게트의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아직 생생하다. 그리고 리셉션에 있던 분이 매우 유쾌하고 친절했던 기억이 난다.
세계 여행 중인 한국인 부부를 다시 만났다. 오늘 저녁은 닭고기 요리를 할 예정인데 같이 식사를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난 감사해서 대신 와인을 사겠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슈퍼마켓에서 같이 장을 보며 필요했던 물품을 보충했다. 샴푸와 린스, 바디워시 기능이 전부 있는 제품을 하나 샀다. 한국에서 단단한 비누 하나를 준비해 왔는데 통풍이 잘 안되다 보니 얼마 안 가 물러져서 쓸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다들 올인원 제품을 준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PS. 인터넷으로 본 순례길의 멋진 풍경들을 내 눈으로 담고, 내 카메라에 담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작 나의 손에는 카메라 대신 값비싼 휴대전화가 들려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가기에는 무겁다는 판단에 휴대전화를 최신형으로 교체해 갔다. 무게라는 현실과 타협을 했지만, 결론적으론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다음에 또다시 이 길을 걷는다면 배낭은 동키 서비스로 보내고 카메라를 가지고 걷고 싶다.
Tip. 동키 서비스란 대략 6유로 정도에 내 배낭을 다음 목적지 알베르게까지 가져다주는 서비스다. 배낭을 반드시 짊어지고 걸어야만 완전한 순례로 인정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지만, 체력이 부족하다면 과감히 동키로 보내고 길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 생각된다. 대신 작은 가방 하나를 준비해서 현금이나 여권, 경량 우비 정도는 몸에 소지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