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벨로라도 22.2km
아침 기온이 조금 떨어진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걷기엔 좋은 조건이다. 제법 쌀쌀했지만, 점퍼는 벗고 출발했다. 오늘도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다. 여전히 멋지고 드넓은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미세먼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맑은 날씨다. 지금까지 ‘나바라’ 주를 넘어 ‘라 리오하’ 주를 지나왔다. 이제부터는 스페인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카스티야 이 레온’ 주가 시작된다. 끝없는 메세타 평원이 이곳에 있다.
고온 건조한 스페인의 여름은 평균 해발이 높은 탓에 일교차가 컸다. 하지만 일조량이 워낙 풍부해서 농작물이 아주 잘 자란다고 한다. 농사꾼 친구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 비해 두세 배는 수확량을 늘릴 수 있고, 비용은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여태 순례길을 걸으며 본 들판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본격적인 스페인의 곡창지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말은 그만큼 그늘도 없고 길이 단조롭다는 뜻이다.
태양이 뜨겁게 길을 달구고 있지만, 적당한 바람으로 인해 견딜 만했다. 그동안 같이 걸어왔던 이삼십 대 친구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체력과 시간에 맞춰, 그리고 각자의 속도대로 자기의 순례길을 만들어 갔다. 난 자연스럽게 뒤처졌고, 다시 혼자가 됐다. 한국에서 준비하는 동안 난 철저하게 혼자 와서 혼자 걷다가 혼자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고 낯선 스페인의 순례길 어딘가에서 생각에 잠겨 걷는 나를 상상했다.
열흘이 조금 안 된 어느 날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어느 곳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난 그 순간 깨달았다. 그렇게 멋진 장소들을 수도 없이 지나왔는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을. 지나온 마을의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기억 속에,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들려준, 나와 순례길에 동행했던 그들만의 역사가 그 어떤 경치보다 가치 있게 나에게 다가왔다.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이나 환경은 전부 다르다. 나는 늘 나의 관점에서 상대를 평가해 왔다. 이것은 내가 옳다는 가정하에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완전하지 않은 내가 무슨 근거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는지.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모두 달랐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그들과 이야기하며 알게 됐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이해와는 별개다.
한번은 Bar에서 콜라 하나 사려고 5분을 서 있었다. 나를 비롯해 순례자 손님들로 길게 줄이 서 있는 상황이었다. 대부분 커피나 음료 하나 사려고 서 있었다. 그런데 주인은 가게에 찾아온 자기 친구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잠깐 그러려니 했지만, 대화가 꽤 길어졌다. 내 앞에 있던 사람이 주문하겠다고 하니, 기다리라는 짧은 손짓뿐이다. 거기에 서 있던 손님들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행동에는 자기의 행복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래의 행복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우리와 많이 다른 모습이라 생각됐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수고를 참고 견디는 데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관점과 다른 것이다. 그동안 난,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의 행복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