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20.6km
어제는 축제 구경하느라 많이 걸은 데다가, 부르고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있는 야트막한 산에 올랐더니 피곤해서 기절하다시피 했다. 순례길 중간에 쉬어가려고 연박을 했는데 오히려 더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부분 출발했는지 조용했다. 인대가 손상되어 하루 이틀 더 쉬어야 하는 이십 대 한국인 친구만 보였다.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식당에는 아침을 먹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나도 어제 사둔 빵과 주스를 간단히 챙겨 먹고 출발했다.
고도계를 확인해 보니 대부분 평지라는 것을 알고 기쁜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부르고스 시내에 있는 울창한 숲 터널을 지나니 잘 보존된 중세 시대 건축물이 나타났다. 유적지인가 싶었는데 부르고스 대학이었다. 저런 곳에서 공부하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가다 보니 미국 애틀랜타에서 왔다는 제인을 만났다. 그런데 발걸음이 부자연스러워 물어보니 무릎과 발목이 상태가 좋지 못해 천천히 걷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올해 60세로, 간호사로 일하다 정년 퇴임한 후에 순례길에 왔다고 했다.
먼저 가라고 인사하는 제인을 뒤로하고 난 또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휴대전화에 알림이 왔다. 오늘 예약한 알베르게에서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두 시까지 오라고. 시간을 보니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마침, 필리핀에서 온 한국인 어머니와 아들 일행이 나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예약한 곳은 없는데 내가 묵을 곳에 먼저 가본다고 말했다. 난 그 어머니께 먼저 도착하시면 내가 부지런히 가고 있다고 호스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시까지 꼭 가겠다고.
1시 53분.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이다. 몇 명의 순례자들이 침대를 구하지 못해 알베르게 앞에 대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하마터면 다음 마을까지 강제로 걸어가야 할 뻔했다. 필리핀에서 온 한국인 모자는 바로 앞에 있는 알베르게에 다행히 침대가 남아 그곳으로 가셨다. 그분이 내가 열심히 오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고 콜롬비아 출신 호스트가 웃으며 알려줬다. 그녀도 몇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스페인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서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살게 됐다는 사연을 들려줬다. 나에게도 적극 권유하는 그녀의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다 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데 이곳은 커다란 팬으로 빠에야를 직접 만들어 나눠줬다. 만드는 모습은 TV에서 잠깐 봤는데 직접 보니 우리의 볶음밥 만드는 방법과는 매우 달랐다. 족히 80cm 정도 되어 보이는 큰 팬에 각종 재료를 올리브유에 볶은 다음 그것들이 잠길 정도의 많은 양의 육수로 끓이다가 쌀을 넣고 익히는 방식이었다. 육수가 줄어들며 쌀과 재료가 익으면 소스와 추가 재료를 넣고 평평하게 펴주면 됐다. 물론 곁눈질한 기억을 더듬어 본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맛은 일품이었다. 난 먹기에 바빴는데 앞과 옆에 앉은 이탈리아 여자와 영국에서 온 여자의 수다에 귀가 아팠다. 얼른 먹고 일어나야 했다. 수다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Tip. 알베르게 예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5월에서 9월 사이 순례자가 많은 계절엔 이틀 정도는 예약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대체로 부킹닷컴 앱으로 하거나 왓츠앱으로 직접 호스트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방식을 사용한다. 순례자들이 사용하는 부엔까미노 앱이나 닌자 앱을 보면 호스트의 왓츠앱 전화번호가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