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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Aug 21. 2024

나 아직 살아있어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 카스트로헤리스 19.5km

새벽 5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다. 최근 날이 상당히 더워지고 있어서인지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알베르게를 나서니 뒤편으로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태양이 떠오르자 출발할 때 입었던 점퍼는 벗어야 했다. 덥고, 바람도 안 불고, 그늘도 하나 없는 길을 계속 걸었다. 그래도 오늘 가는 카스트로헤리스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 저녁을 비빔밥으로 준다는 말에 힘을 내 걸었다.



온타나스라는 마을에서 쉬어 갈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테르가에서 만났던 론과 마야였다. 둘은 미국에서 온 아빠와 딸로 우테르가 알베르게의 저녁 식사 시간에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한의 핵 위협에 관심이 많던 론은 한국인이 매일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대다수의 한국인은 ‘어! 또 쐈어?’ 이러고 각자 담담하게 자기 일을 한다고 했더니 매우 놀라워했다. 오히려 미국 행정부의 발언이 북한을 자극할 뿐이라는 깨알 같은 충고도 곁들였다.



한동안 못 만났던 론과 마야를 만나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서 이야기하다가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론은 힘이 들었는지 마야를 데리고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던 Bar에서 쉬어간다고 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지만, 나중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온타나스라는 작고 아기자기한 예쁜 마을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가다 보니 지금은 폐허가 되어 뼈대만 남은 산 안톤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14세기에 지어진 이후로 순례자의 병원 겸 안식처였다. 아직도 알베르게를 운영 중이라고 한다.



부지런히 걸어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 오리온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사람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마지막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일본인 노부부와 몇 명의 외국인을 빼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조금 있으니 한 스페인 사람이 문을 열어주며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그의 한국어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지만 정겨웠다. 부르고스에서 만났던 한국인 친구와 함께 라면과 김밥을 점심으로 먹었다.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오랜만에 먹는 한국의 맛은 나를 신나게 했다.



모처럼 고향의 맛을 만끽한 후 한가로운 오후 햇살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나와 위아래 침대를 사용하게 된 한국인 어르신이 내 옆으로 와 앉으셨다.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조심스레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셨다. 아내와 사별하고 본인의 나이 55세에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 후로 재산을 정리해 여생의 마지막을 치료 대신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70세가 된 지금까지.



그분은 어느 순간 ‘죽을 때가 지났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보니, 암이 깨끗하게 자연치유가 되었다며 담당 의사가 더 놀랐다고 한다. 일 중독자였던 과거를 후회해 미친 듯이 여행을 다니셨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많이 다녀’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와 함께 오신 그분의 이야기는 훨씬 더 깊고 많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어쨌든 일에 매달려 앞만 보고 살아가기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주위를 둘러보며 행복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길 바라셨다.



PS. 사람들은 대부분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아낸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어느 순간이 마지막인지 아무도 모른다. 지나친 걱정도 문제이지만 어떤 모양으로 내게 다가올지 모르는 미래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해지길 바라셨던 그 어르신의 말씀처럼, 내가 놓치고 있는 행복의 순간들은 없는지 다시 한번 둘러봐야겠다. 네 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지만,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한다. 우리는 수많은 행복이 곁에 있는데 하나의 행운만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Tip. 산 안톤 수도원 자리에 있는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 중이다. 저녁과 아침도 준다. 단, 온수가 나오지 않고 전기 시설이 없다. 14세기에 지어진 그대로를 느껴볼 사람은 도전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경험해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밤에 별을 한가득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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