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성부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우리들의 양식』(이성부 시선), 이성부, 민음사(2006.08.25)
이미 와 있는 봄
민주화가 아니어도
자유라는 이름 없어도
봄은 온다, 오고야 만다
입춘 꽃샘바람에
김칫독은 얼어 터지고
단칸방 모자란 이불 아래
몸들이 겹쳐 눕는다
부딪히다 와락,
그 온기 하나로
봄은 이미 와 있다
봄은 영웅의 승리가 아니라
시린 겨울을 함께 견딘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 속에
먼저 둥지를 튼다
계절은 필연,
당신도 필연
더디다 생각했지만
봄은 피어 있었다
그러니 이제
가슴 펴고 고개 들어라
봄 길 위로 꽃은 피고
또 피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