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게-이병률
청춘에게
그리곤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가방에는 별로 든 것이 없을 것이므로
가방 바퀴 따윈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행자만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여행에선 내가 손님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경계가 지워진 며칠 동안의 시간대
단풍의 속도로 덮쳐 오는 우울
무능한 행복의 개념과 상관없는 안전지대에서는
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있을 것이다
체온을 유지할수록 풍요로울 수 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에 대한 배려가 있으려면
혼자만의 춤을 추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다 낮인데도 불이 켜져 있고 문은 걸어 잠그지 않은,
아무것도 진열되지 않은 가게에 도착할 것이다
그래도 돌아가는 냉장고,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면 그래도 될 것이다
무엇에 가까워지려 애쓰는 사람들 뒤로 한참 물러서려다가
발을 헛디뎌 느긋한 공기를 만난 그날 이후여야만 여행의 자격은 부여된다
그래도 여행자로 살 것이라면 계속해서 잃어야만 한다
이길 것도 이길 일도 없는 길 위로 다시 나서서는 구질구질해도 된다
모두 다 끝났다는데도 끝까지 괄호를 밀고 가는 이는 나뿐일 것이며
그래서라도 마음을 얽어맬 상대는 거기에 없다는 것이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게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인생을 지내기 위해
다시 길을 잃은 다음
돌아오지 않는다면 인생이 명백해질 것이다
이것 이외의 길은 없을 거라는 단호함으로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문학과지성사(2024.4.24)
잃음의 자격
길을 잃는다는 것
낯선 허공 위에 첫발을 떼는 일
애초에 정해진 길 같은 건 없었으니
길 밖으로 밀려나야 비로소 목적지가 생긴다
여행자는 계속해서 잃어야 한다
손님처럼, 이방인의 눈빛으로
스스로를 환대하며
그 단호한 잃음이 나를 불러내는 자격이 된다
길 위에서 문득 조르바의 춤을 떠올린다
혼자만의 축제를 연다
길을 잃었으므로 가벼워진 어깨 위로
나만이 아는 자유가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