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만 아는 이야기
퇴사기념
첫 바다여행을 위해
심사숙고 후, 2박 3일 날짜를 골랐다.
1. 퇴사의 짜릿함이 가시기 전일 것
2. 현실의 무거움을 느끼기 전일 것
3. 날씨가 화창할 것
4. 휴가철 성수기가 아닐 것
5. 남편의 일정이 맞을 것
퇴사를 확정하자마자
이런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
예약을 완료했다.
매우 야심 차게.
모든 것은 완벽했으나
난 나의 자궁과 일정을 상의하는 것을
잊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매월 8-9일쯤 시작하는
나의 월간 일정은
웬만해서는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본인을 잊은 것이
못내 서운했던 자궁은
여행 이틀 전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며
드릉드릉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물색없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제발, 부디
단 하루만 물놀이하게 해줘.
드디어
떠나는 날!
컨디션 댓츠 오케이.
해가 떴으나 구름이 낀,
후덥지근하지만 땡볕은 아닌,
물놀이하기 딱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차로 3시간 넘게 가야 하는 일정인 만큼
아침부터 서둘러 여행길에 올랐다.
휴게소에서 국밥도 사 먹고
(물론 남편은 부대찌개를 먹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사 먹고
(물론 남편은 망고슬러시를 먹었다)
이제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우리의 휴가지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바로 그때,
나의 자궁이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는 그 순간
건너편 옷가게 매장의
마네킹이 되길 바랐다.
극도의 배신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데,
단 하루를 못 기다려주니?'
'오늘 딱 하루만 버텨주면
내일부터는 나도 운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잖아.'
결국 나는
입수 한 시간을 남기고
바닷속 작은 물고기들과의 약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진통제 두 알을
물과 함께 삼키며
아이스박스에 넣어 온
와인 네 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때는
오지 않음을 걱정하던 날도 있었더랬다.
친구 옆에 있으면
나도 옮는다며
월간일정 중인 동무를
찾으러 다니기도 했었다.
나의 자궁은
나와는 뜻이 잘 맞지 않았으나
어딜 가도 늘 나와 함께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나와 꼭 닮아서
아주 즐거운 여행길에는
언제나 앞장섰다.
선구자 같은 X.
이제 나에게 남은
월간일정은 약 180번 남짓.
엄마는 떠나고 나면 서운하니
있을 때 잘해주라던데
과연 남은 만남 동안
우리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까?
폭풍 같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그 친구는 거짓말처럼 떠나갔다.
그래. 잘 가렴.
나 다음 달엔 광복절에
놀러 갈 거야.
어디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