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에 관해

사랑하고 놀고 연대하고 일하는 삶을 꿈꾸며... 2

by 나하나

‘놀기 위해서 일한다!! 편하게 놀려면 더 제대로 빡씨게 일해야 한다.’ 놀이에 관해, 지난 10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이다. 그렇게 놀 날을 기다리며 힘겹게 일하는 나를 위로했다. 어쩌면 일이 우선인 삶을 살았다.


지난해와 올해는 좀 놀았다. 간다 간다 했던 뉴질랜드를 갔다 왔다. 가장 먼저 놀란 건 밤 아홉 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하루였다. 그리고 석양이 지고 쏟아지는 수많은 별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마운트 쿡에서 쩌억 갈라지는 빙하와 빙하가 녹은 물의 차가움은 얼얼하게 남아있다. 카와라우 강 다리에서 한 줄에 매달려 번지점프를 기다리던 순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릿하다. 밀포드 사운드의 깡마른 산새와 온몸을 때리던 폭포의 촉감이 선명하다. 무엇보다 길게 뻗은 나무 아래 푸른 잔디에서 벌러덩 누워 잤던 낮잠. 잔디만 보이면 달려가서 책을 읽으면서 잤다. 영어와 숙식의 압박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서 오롯이 쉬면서, 놀았다.


그리고 함께 활동하고 있는 이들과 갔던 태국. 치앙마이에선 (아직 애인이 아니었던) 나님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자전거 타고 돌아다녔던 순간이 가장 설레고 좋았다. 폭염주의보가 내렸던 날 즐겼던 온천도 뜨겁게 남아있다. 최고의 순간은 무꼬수린이었다. 무꼬수린은 해병대가 주둔했던 곳인데, 군대가 빠져나간 후, 12월에서 3월까지 일반인들에게 개방하는 무인도다. 할 수 있는 건 삼시세끼 먹고 낮에 니모를 찾아 바다로 향하고,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날이 저물면 할 게 없어 별을 보고 또 본다. 끝없이 펼쳐진 별을 보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져 도시에서 품고 있던 수많은 상념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등바등하지 말아야지!! 일하는 것보다 더 놀아야지!!! 금방 무너질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뉴질랜드와 태국에서 놀았다.



다짐했지만 엄청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일처럼 느껴지는 요즘, 놀이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창작활동이라는 게 모든 순간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놀이와 일을 구분하기 어렵다. 논다면 마냥 노는 건데, 일하는 거라면 엄청 일하는 게 되는 게 창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내가 느끼는 방향은 모든 순간이 일로 다가오고 있다. 일상은 일로 점령당해버렸으니까 놀고 쉬기 위해서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그래서 지금 지리산 어느 자락에 와 있다.

지리산에 와서 한 거라고는 부산에서 일 마치고 하는 일과 같다. 드라마 보고,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면서 영화에 담을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만약 도시에서 이런 걸 했다면 오늘 하루도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 보기와 만들기, 글을 읽고 쓰는 게 놀이였던 내가, 어느 시점부터 이 모든 게 일이 되어버린 이유는 뭘까? 톺아보면 어느 시점부터 ‘나도 노동자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 그와 관련된 일도 모두 노동이다.’라는 걸 강조해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창작 노동’에서 나는 창작의 특수성보다 노동의 보편성을 더 강조하면서 활동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창작이 아버지가 했던 용접과 같을 수 없고, 어머니가 하고 있는 식당 일과도 다르다.



창작 노동은 놀이와 일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 특수성 안에서 나는 노동, 일에 방점을 찍고 내 활동을 규정해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즐겼던 영화 보기와 책 읽기, 글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게 일이 되어버렸다. 때론 산책하고, 하물며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는 것까지 노동이 되곤 한다. 때때로 화장실에서 아이디어와 엉킨 생각이 더 빨리 정리되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나는 일상과 노동을 구별하기 힘든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과 일을 명확하게 구분 짓기 위해 애쓰기보다 일이라고 규정지었던 재미난 것들을 놀이로 틀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창작을 하는 동안 일에 잠식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제 나님이 내가 있는 지리산으로 왔다. 한바탕 크게 다투고 꽁냥꽁냥 중이다. 필름 카메라 하나 들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있다. 이동할 때는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앉았을 때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한다. 나는 묵혀둔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쓰고 있고, 나님은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우린 놀고 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놀이가 될 수 있다. 창작은 내게 놀이였던 동시에 정치활동의 장이었기에 그를 위한 노력도 놀이의 일환이다. 일을 놀이로 전환해 일상을 찾아야 할 시기다. 뉴질랜드와 태국에서 노는 것만이 놀이가 아니다. 일상에서 영화 보고 책 읽고 글 쓰고, 때론 영화 만드는 어떤 순간까지, 나님과 꼼냥꼼냥 하는 것 모두 놀이지 않은가... 그것들이 놀이가 된다면 내 일상은 김밥천국보다 많은 놀이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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