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자부심은 저주를 낳는다
내 자랑을 하나 하자면 글씨가 아주 기가 막힌다. 다들 처음 보면 폰트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학창 시절, 온라인 손 글씨 대회에서 누리꾼 투표 1위를 차지하여 실제 폰트로 출시하기도 했다.
내 친구 수인이도 글씨가 아주 기가 막힌다. 다들 처음 보면 뭐라고 쓴 거냐고 말한다. 실제로 학창 시절, 교내 악필 순위 친구들 투표 1위를 차지하여 안 좋은 예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우리의 특징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글씨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온 나는 종종 얄미운 짓을 했다.
함께 식사하고 후식을 먹으러 카페에 들어온 참이었다. 계산 후 영수증을 받았는데, 못된 마음이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며 모습을 드러냈다. 영수증과 펜을 수인이 앞에 밀며 내역을 똑같이 써보라고 했다. 수인이는 오랫동안 당해왔던지라 익숙하다는 듯 아이스 아메리카노, 딸기스무디, 가게 주소 등을 써 내려갔다.
“어떻게 글씨가 한 번을 안 변하니.”
수인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딸기스무디를 마셨다.
“아직도 사람들이 정확하게 못 읽어서 네가 읽어주지? 나중에 네 자식이 엄마는 글씨가 왜 이러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래? 애도 악필이면 어떡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연습 잘 시켜볼게.”
수인이가 글씨의 중요함을 가볍게 여기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의 자부심이 수인이에겐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닌 듯해 심술이 났다. 날 부러워하길 바라는 마음이 약간 있었다는 걸 인정하겠다.
“기억나? 너 학교 다닐 때 악필 1위 뽑혀서 망신당했던 거. 심지어 너한테 투표한 애들이 네 글씨 닮아갔다는 이상한 소문도 있었잖아. 글씨 때문에 네가 별일을 다 겪었는데, 그래도 아무렇지가 않아?”
“난 재밌었어.”
“진짜 철 안 드네. 기태훈 그놈도 그걸로 너 놀렸…… 미안.”
우리 사이엔 절대 꺼내선 안 될 이름이 있다. 기태훈. 수인이에게 악필 한 표를 찍어줬던 우리의 동창이자 수인이의 전 남편이다. 10년 연애했지만 결혼 생활 4년 만에 성격 차이로 이혼했는데, 그는 3개월 만에 재혼해 버렸다. 기태훈의 재혼 소식을 들은 날은 수인이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고민 끝에 수인이는 기태훈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지 않기로 했고, 인생에서 그 이름을 영원히 지워버렸다. 그런데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그 이름을 내가 방금 배설하고 말았다.
“미안해. 말이 잘못 나왔어.”
평소 화가 없는 사람이 화나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온기 하나 없는 수인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무섭고 떨렸다.
“내 글씨가 그렇게 신경 쓰이면 그것만 보고 살아.”
영문을 모르겠기에 대답도 못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수인이는 부연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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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푹 자지 못해 찌뿌둥한 컨디션으로 일어났다. 계속 수인이 생각을 했다. 사과하는 꿈까지 꿨다. 나는 이게 문제다. 글씨 문제에 유독 예민해져서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구분을 못 한다. 이따 연락해서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내 직업은 폰트 디자이너다. 나에게 이보다 더 알맞은 직업은 세상에 없다. 곧 출시할 폰트의 최종 점검을 위해 모니터를 보다가 눈을 한 번 비볐다. 잠이 아직 덜 깼나 싶어 커피를 사 왔다. 커피를 마시고 보아도 변하지 않았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싶어 지나가던 동기를 부르려다 명패에 눈이 갔다. 기겁해서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동기가 왜 그러냐며 다가왔다. 동기의 손에는 복사한 문서가 들려 있었는데 이마저도 그랬다.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세상에! 내가 디자인한 폰트가, 사무실의 모든 명패가, 중요한 문서가, 세상의 모든 글자가 수인이 글씨로 보였다. 괜찮냐는 동기의 손길을 뿌리치고 밖에 나왔다. 화장실 표시도, 정수기 주의 사항도, 비상구 표시도, 복도에서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라는 안내문도, 내 사원증까지 수인이 글씨가 아닌 게 없었다. 동기를 데리고 나왔다. 안내문을 가리키며 이 글씨체 어때 보이냐고 물었다.
“와…….”
“네 눈에도 이상해 보여?”
“빨간색 궁서체라니. 엄청나게 강렬하다.”
강렬한 빨간색 수인이 필체가 아니고? 다른 글씨를 가리켜도 동기는 원래 폰트로 잘 보인다고만 했다. 내가 이상한 저주에 걸린 듯했다.
제일 괴로운 건 내가 쓰는 글씨도 수인이 글씨라는 점이었다. 결혼식장 축의금 봉투에 내 이름을 쓰는데, 아무리 정성 들여 써도 수인이 글씨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대신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의 자부심은 기어 다니는 획 속으로 추락해 버렸다.
악필로 살며 여러 번의 계절을 보내는 동안, 수인이와는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지금은 집착을 내려놓은 상태다. 익숙함이란 참 대단한 거였다. 악필이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내가 유독 잘 써서 기민하게 반응했음을 자각했다. 난 참 얄미운 친구였다.
다만 일할 때는 큰 문제였다. 매일 폰트를 보고 살아야 하는 직업인데, 하나의 악필만 보이니 일에 진전이 없었다. 고민 끝에 휴직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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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집에 들어가려는데 간절했던 얼굴이 보였다.
“수인아!”
놀라서 가방을 떨어트렸다. 수인이는 아기를 안고 서 있었다.
“잘 살고 있었어?”
수인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안도감이 들어 눈앞에 안개가 서렸다. 얼굴이 축축해졌다. 이 저주를 풀어달라고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쌓아온 미안함이 폭발해서였다.
“애 키우느라 정신없어서 네 생각을 못 했어. 일주일만 겪게 하려고 했는데. 미안해. 그래서 저주를 풀어 주려고 왔어. 이런 말 좀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는데.”
저주가 풀리면 휴직 신청을 철회해야겠다.
“네가 돈을 지급해야 해.”
“돈? 얼마나? 백신 같은 걸 사야 하는 거야?”
“이건 저주지 감염병이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너의 돈을 써서 나에게 이 저주와 관련한 뭔가를 제공해야 해.”
이런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혹시 수인이가 아기 키우느라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이런 식으로라도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수인이가 부잣집 딸이라는 게 뒤이어 생각났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이건 어때?”
이보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기꺼이 돈을 지불해 수인이에게 제공할 의사가 있다.
다음 날, 수인이네 집 근처 악필 교정 학원에 방문해서 수인이의 1년 치 학원비를 기분 좋게 결제했다. 돈이 빠져나가자 저주가 풀렸고, 난 비로소 명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