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중 둘 사이의 비밀

필름 끊긴 나만 모르는 회식 자리에서 생긴 일

by 나희구

어제 과장님과 대리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운데 낀 나만 곤란해졌다.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두 분 혹시 싸우셨냐고 물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어제저녁, 오래간만에 회사에 출근한 대리님을 위해 과장님과 함께 격려 차원의 술자리를 마련했다. 대리님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장례를 치르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2주 휴가를 냈고 어제 복귀했다. 나는 대리님을 위로하고 분위기를 띄워서 슬픔을 잊게 해 주고픈 마음에 주량보다 많은 술을 마셨다. 이게 화근이었다. 끝까지 정신 차려야 했는데 갑자기 훅 취해버려서 필름이 끊겼다.


평소엔 일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과장님과 대리님이 오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이좋았던 사람들이 싸우니 사무실이 얼음장 같았다. 나라도 나서야겠다. 평소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로 무거운 고요함에 균열을 냈다.


“과장님 반지 있잖아요. 제 친구도 사려고 했는데 전국 품절이라 못 샀대요. 인기 진짜 많은가 봐요. 과장님 안목 있으시다. 그렇죠, 대리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리님이 일어났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대리님의 낯선 모습이 무섭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괜히 과장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어제 대리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죠?”


과장님은 그런 거 아니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두 분 사이에 낀 저는 무슨 죄예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화해해 주세요. 제발요.”


과장님은 머그잔을 집으려다 자기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반지를 빼서 서랍에 넣었다.


오늘만큼 퇴근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밖에 나오니 겨우 편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직도 남은 숙취를 해소하고자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만 모르는 불화가 발생한 문제의 가게가 보였다. 뚫어지게 가게를 쳐다보자, 유리창 너머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은 반갑다는 듯 문을 열었다.


“잘 됐다. 이거 가져가요. 어제 놓고 갔더라고.”


사장님은 과장님의 반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내게 건넸다.


“파마머리 언니가 단발머리 언니한테 주는 거 봤어. 나중에 자기들 가고 테이블 치우다 발견한 거야.”


과장님과 대리님 얘기가 틀림없었다. 왜 대리님이 과장님한테 똑같은 반지를 줬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사내에서 유독 친한 두 사람이다. 여행도 같이 가고, 난 한 번도 못 가본 과장님 자취방도 대리님은 여러 번 가봤다고 한다. 둘이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지…… 아!


“커플링이네!”


먹자골목에 내 목소리가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과장님과 대리님의 손부터 봤다. 과장님 손에 반지가 없다. 대리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봤다. 어제 과장님이 반지를 직접 빼는 모습을. 둘이 똑같은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연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 애초에 커플링으로 출시된 반지였다. 지금 둘 다 없는 이유는 싸워서 뺀 거겠지. 이제 다 알겠다.

대리님에게 사장님께 받은 반지를 돌려주려 했는데, 둘 사이 눈치챈 걸 알리는 꼴이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모든 게 사랑싸움 때문이라니, 그저 웃겼다.


“나랑 박 대리 잠깐 카페 좀 다녀올게. 커피 사다 줄까?”


드디어 화해하기로 했나 보다.


“전 괜찮아요. 두 분 천천히 대화 나누다 오세요.”


과장님과 대리님이 나갔고 사무실 분위기가 다시 따스해지겠단 생각에 안심했다.

두 사람이 나간 지 한 시간이나 흘렀다.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한 잔 부탁할걸. 커피도 사고 둘이 화해하는 현장도 구경할 겸 일어났다.

하지만 차마 커피를 주문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허락했는데!”


대리님과 똑같이 생긴 중년 여성이 과장님을 향해 고성을 질렀다. 옆에는 눈을 질끈 감은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엄마, 그만해!”


카페 난동 이후가 내겐 더 충격이었다. 대리님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리님 반지는 주인에게 가지 못한 채, 내 서랍에 방치되었다.

반지의 존재도 잊었을 무렵, 퇴사 후 처음으로 대리님에게 전화가 왔다.


“컴퓨터에 있는 중요한 파일을 안 옮기고 그냥 나왔더라고. 혹시 메일로 보내줄 수 있을까?”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단 소리가 ‘밥 먹자’도 아니고 파일 좀 보내달라니. 부쩍 말라가는 과장님을 생각하면 썩 달갑진 않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보내주기로 했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자 잠시 후 바탕화면이 떴다. 대리님 가족사진이 나왔다. 밝게 웃고 있는 대리님과 카페에서 본 부모님과 영정사진으로 본 대리님 동생이 나란히 서서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막내딸을 잃은 충격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맏딸이라도 행복했으면 하신 걸까. 지금은 다들 잘 살고 계시려나.

대리님이 말한 폴더를 찾기 위해 마우스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어? 이게 왜…….


-


“과장님, 오랜만에 한잔해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과장님은 놀란 듯했지만 그러자며 함께 나갔다. 또 거기였다. 과장님과 대리님 둘만의 비밀을 알려준 그 가게.


“대리님이랑 연락하세요?”


대리님 얘기가 나오자, 과장님 낯빛이 어두워졌다. 반지를 과장님 앞으로 밀었다. 과장님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처음엔 대리님 반지인 줄 알았어요. 두 분이 사귀는 사이인 줄 알고.”


때마침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과장님의 컵에 먼저 따르고 내 컵에도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대리님 컴퓨터 배경 화면 본 적 있으세요?”


과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대리님 가족사진인데, 대리님 동생이 이 반지를 끼고 있더라고요.”


죽은 연인 얘기에 과장님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울었다. 사람들이 힐끔거려도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


사고가 일어났던 밤은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크게 싸웠고 대리님 동생은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자며 어둡고 미끄러운 횡단보도를 망설임 없이 달렸다. 애인의 마음을 달래러 가는 그 길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방향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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