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선 감정을 죽인 선배의 은밀한 욕망
지인 선배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매사에 무관심하다고 해야 할까, 염세적이라고 해야 할까? 사석에선 어떤지 몰라도 출근하면 감정 기능을 죽여 버리는 듯하다. 일은 흠이 없었다. 사람은 벽이 있었다.
내가 신입이고 지인 선배가 나의 사수였던 시절에도 한결같았다. 질문하면 대답은 해주되 친절하진 않았다. 입사 이래 단 한 번도 사담을 나누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엔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선배의 성격을 존중한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선배에겐 의외인 점이 있는데, 바로 패션 SNS 계정 운영이다. 매일 아침 본인의 출근 복장을 거울 셀카로 찍은 후, 해시태그 #OOTD를 달아서 올린다. 우린 패션 회사 직원들이라, 비슷한 계정을 운영하는 직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올리는 게 쉽지 않아 대부분 중간에 그만둔다. 유일하게 입사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 지인 선배다.
게시글에도 선배의 성격이 보인다. 그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사진과 해시태그만 올린다. 선배의 팔로워 중 한 명인 나는 패션도, 게시 스타일도 선배답다고 생각하며 ‘하트’를 누른다.
회사에서 곧 신상 의류가 출시된다. 떠오르는 신예 하영은이 디자인에 참여해서 출시 전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런 하영은이 연예인 사생활 관찰 프로그램 ‘카메라가 꺼지면’에 출연하는데, 같이 회의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했다.
“일단 디자인팀에선 2명 들어가기로 했어. 제작진이 하영은 포함 총 6명으로 맞춰 달래. 마케팅팀에선 3명 들어갈 수 있는데 누가 할래?”
회의실이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솔직히 내가 들어가고 싶었다. TV에 출연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하영은에게 협업을 제안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나였는데. 다른 사람들도 원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 손들기를 망설였다. 이 눈치 게임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표님이랑 저, 세미 씨 이렇게 세 사람이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요.”
지인 선배였다. 출연을 자원한 것도 놀라운데, 나까지 데려가서 벙찐 표정이 되었다.
“대표니까 참석하시고, 하영은 씨 소속사랑 연락하고 조율하던 게 저랑 세미 씨니까 저희가 하는 게 맞죠.”
그렇게 대표님, 지인 선배, 나, 디자이너 두 명, 하영은은 2주 뒤 회사 제1회의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방송 출연이다. 오늘 신경 좀 썼다. 문득 지인 선배는 어떻게 입었을지 궁금했다. 일주일 전부터 호들갑을 떨던 나와 다르게, 지인 선배는 방송 촬영 일정 자체를 잊고 사는 듯했다. 놀랍지도 않다. 방송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특별히 더 신경을 썼겠나 싶었다. 평소처럼 하트나 눌러주려고 SNS를 열자 선배 게시글이 떴다.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평소의 선배 스타일이 아니었다. 선배의 평소 스타일은 면바지와 셔츠를 주로 착용하고 특이한 색감의 양말이나 가방, 모자에 포인트를 준다. 오늘은 위아래 감색 정장을 입었다. 완전한 격식을 갖춘 정장이 아니라 넥타이는 생략했다. 여기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어서 선배 스타일의 정장 패션을 완성했다. 제일 놀라운 건, 어제까지만 해도 길었던 생머리가 하루아침에 단발 파마머리로 바뀌었다는 거다. 역시 선배도 방송 촬영만큼은 관심을 거두기 힘들었던 거다. 처음으로 인간미를 느끼며 하트를 눌렀다.
촬영 15분 전 대표님, 지인 선배, 내가 같은 줄에 앉았고 그 반대편 가운데에 하영은과 양옆에 디자이너들이 앉았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하영은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인사를 건넸다. 속으론 진짜 예쁘다고 난리가 났지만, 겉으론 체통을 지켰다. 지인 선배는 예의상 차리는 작은 미소를 건넸다. 대표님은 하영은과 친해지려 애쓰고 있는데, 선배는 회의 자료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촬영을 시작했다. 하영은이 홍보를 위한 몇 가지 이벤트를 제안한다며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이번 신제품을 구매하면 사은품을 제공했으면 합니다. 보통 사은품이라고 하면 회사에서 정해준 제품들이 나가잖아요. 이번엔 고객이 사은품을 직접 고를 수 있게 하는 건 어떨까요? 단, 신제품 중에서 고르는 걸로 제한을 두는 거죠. 하나의 신제품을 사면 다른 하나의 신제품도 사용해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겁니다.”
과연 화끈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화끈해서 할 말을 잃은 나와 대표님을 대신해서 가만히 있던 선배가 나서주었다.
“고객으로선 좋은 경험이지만, 우리는 수익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선단체가 아니니까요. 고객이 구매한 제품
가격을 웃도는 걸 고르는 경우도 따져야 하고요. 자칫하면 1+1 행사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이후 하영은이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 들려주었지만, 지인 선배가 듣는 족족 기각했다. 여기서 유일하게 홍보 차원에서 하는 이벤트성 촬영이 아닌, 진짜 일하러 온 사람이었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하영은이 자리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확실한 캐릭터 하나 나와서 PD님이 좋아하시겠네요.”
과연 하영은은 패션 업계 사람이 아닌 방송 업계 사람이었다.
내 우려와 달리 하영은 말대로 방송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 말을 주고받는 편집이 재밌었다. 하영은이 제안하면 지인 선배가 바로 반박해 버려서 입으로 공을 주고받는 CG가 더해졌다. PD는 지인 선배가 꽤 마음에 들었던 건지 선배 이름 밑에 ‘논리 왕’이라는 자막까지 달아주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지인 선배의 활약상이 모두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인 씨 그렇게 한결같더니 이게 방송에서 캐릭터로 살았네.”
“PD가 지인 씨한테만 CG를 아끼질 않더라.”
유일하게 반응 없는 사람은 논리 왕 지인 선배였다.
“회의 들어가시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만 했다. 사실은…….
평소처럼 출근길 내내 SNS를 구경하고 있었다. 지인 선배가 역시나 출근 OOTD를 게시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해시태그가 유난히 많았다.
감정 공개 범위가 분명한 사람이구나. 선배의 길게 늘어선 욕망을 구경하며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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