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로 그리는 마당
온전한 고요
큰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우리 집이 있다. 집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큰 마을이 나오고 그곳에 버스가 하루 네 번 들어온다. 오래전엔 제법 사람도 많이 사는 큰 동네였다는데 젊은 사람들이 타지로 나가 살다 보니 원주민은 몇 가구 남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전원주택 붐이 일어 타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대개 복숭아 과수원을 대지로 변경하고 분양해서 집이 들어섰다. 우리 집터도 복숭아 과수원이었고 지금도 5월이면 동네 곳곳에 도화가 만발하여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다.
이사 온 첫날 1층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으로 발 디딜 틈이 없어 2층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커다란 보름달이 둥실 서쪽 창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아파트에 살 땐 앞 동과 옆 동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보름달은 이 집에 보너스로 딸려온 것만 같았다.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만 있는 보름달 자랑을 하며 하룻밤 묵어가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좋은 건 저녁이면 칠흑 같은 어둠과 고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파트에 살 때 들리던 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마트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소리, 물 내리는 소리, 어느 집인지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못 박는 소리, 싸우는 소리, 그런 소음이 이젠 들리지 않는다. 대신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개구리 소리, 새 소리가 들린다. 이젠 이 온전한 고요에 푹 젖어버렸다.
마을 끝에 이르면 나지막한 산이 나오고 그 산을 넘으면 과수원만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거기서부터 과수원 길을 걸어 이웃 마을로 돌아 집으로 오는 길과 다시 산으로 이어지는 몇 갈래 길이 있는데, 그때그때 마음이 끌리는 곳으로 간다. 어디로 가든 실망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시내버스가 들어오는 마을이기는 해도 도로는 2차선도 되지 않는다. 버스를 만나면 길가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버스가 지나가면 가야 한다. 그런 옛 도로이다 보니 구불구불하여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직진을 좋아하고 큰 길이 나야 동네 땅값이 오른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동네의 구부러진 길이 마음에 쏙 든다. 옆 동네에선 길을 넓혀달라는 현수막을 크게 붙여놓았는데 지나갈 때마다 혀를 찬다. 저 예쁜 길을, 차도 조심조심 천천히 달리는 길을 왜 넓히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쭉쭉 뻗은 넓은 길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서 궁금함도 없고 속력만 높아질 뿐이다. 오히려 속력을 낮출 때 보이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챙기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