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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남이 Dec 23. 2020

38 청춘의 여행

0.75달 제주 살기

만일 여행에서 승자가 있다면 그건 '시간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제주 어느 조용한 북카페에서 4시간을 내리 앉아 글 한 편을 쓰고 나오면서 든 생각이다. 우리가 여유가 없나 시간이 없지(?).


제주에 오면 으레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다. 바다가 펼쳐진 카페에 앉아 멍 때리기라든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책 한 권을 읽어 내는 일이라든가, 느지막이 일어나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 일이나, 지는 해를 넋 놓고 바라보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막상 뷰 맛집은 나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서 멍 때리고 있기엔 괜히 뒤통수가 따갑고, 책 읽는 모습을 증하고 나면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느지막이 일어나 맛집에 가면 재료 소진이 되기 일쑤라 오픈 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야 하고, 해는 왜 항상 도로 위에 있을 때 지는 건지 온전히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일이란 여간 쉽지가 않다. 여유를 부리기 위해 시간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여유 없는 여행이 되고 만다.


이번 여행에서는 꼭 '시간 부자'로 지내고 싶었다. 뷰가 환상적이지 않아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한적한 카페를 주로 찾았다. 사진 찍을 곳은 별로 없어도 책 반권은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곳. 11시 오픈도 넉넉히 맞출 수 있는 숙소 주변 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종종 맛에 실패하는 날도 있었지만 완벽한 아침을 충분히 만끽했으니 손해는 아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대충 아무개 바다에서 풍경을 감상하다 집으로 들어간다. 캄캄한 밤 운전에 정말 넋을 놔버릴 수도 있으니 이른 저녁을 먹고 서둘러 귀가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끼리의 흔한 인사는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이다. 나는 시간 부자답게 '별거 안 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은근한 시간 자랑을 한다. 그러면 다른 게스트들은 귤밭 체험이니 알파카 체험이니 하는 것들을 했다고 하거나, 미술관이니 전시관이니 하는 곳에 다녀왔다고들 했다. 역시 내가 제일 부자였다고 자부하며 나만이 진정한 여행을 하고 온 것처럼 은근히 부심을 부렸다.


생각해보면 나도 참 바지런을 떨면서 여행을 했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볼지,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 어떤 새로운 것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돌아다니다 녹초가 되어 숙소에 들어오곤 했다. 여유는 좀 없었어도 더 많이 보고 걷고 경험하면서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여행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대 친구들의 빡빡한 스케줄을 안타까워하던 마음이 더 이상 '28 청춘'의 여행 느낌은 안 되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괜히 서글픈 마음도 들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일은 나가는 길에 차도 없이 뚜벅이로 제주 여행을 하느라 버스에서 시간을 다 보내는 28 청춘들을 다음 숙소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시간 부자니까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이것이 38 청춘의 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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