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트’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
아침 8시 재택근무를 시작한다.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에 접속해 ‘출근했음’을 알린 뒤 대충 메일을 훑어본다. 대략 오늘의 할 일을 파악하고는 커피를 내리러 부엌으로 나간다. 텔레비전 앞의 엄마는 오늘도 이모들과 통화를 하느라 바쁘다.
“언니, 언니는 누가 좋았어? 나는 3번 뽑았는데”
“나도 3번”
“역시, 우리 자매들은 똑같네. 큰 언니도 3번에 문자 보냈다고 했어”
아침마당을 즐겨보는 네 자매는 매주 수요일 코너인 ‘전국이야기대회-도전! 꿈의 무대’를 보며 어떤 사연에 가장 마음이 동했는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아침마당에서 나오는데 “딸, 저것 좀 봐, 저렇게 아픈데도 사람이 참 밝지.” 라던가 “저 교수님 말 좀 들어봐라, 너도 좀 조심해야 돼.” 대체 엄마는 이 슴슴한 아침마당을 왜 매일 보는 걸까. 자매들은 왜 아침부터 문자투표에 열을 올리는 것인지. 재택근무 덕에 아침마다 마주하니 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당은 평일 오전 8시 25분에 시작해 매일 한 시간씩 아침을 지키는데 올해로 무려 30년이 되었다. 월~금까지 매일 다른 코너로 진행된다. 주로 한 때를 풍미했던 연예인들이 패널로 나와 자기 얘기를 하거나, 일반인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거나, 전문가들이 나와 건강이나 생활 정보들을 제공하는 콘텐츠로 일주일이 채워진다.
특히 자매들이 재미있게 보는 코너는 앞서 말한 전국이야기대회인데 전국에 사연 있는 노래꾼들이 노래 대결을 펼친다. 자매들은 이 대결에 문자투표를 보내는 것이다.
각 참가자들은 노래를 부르기 전에 각자의 사연을 먼저 나눈다. 어떤 사람은 오랜 기간 장애를 겪어온 오빠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은 가수의 꿈을 포기 못한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은 투병생활을 하는 자신을 간병하는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특별하고도 어려운 사연을 떨리는 목소리로 잘 정돈하여 단정하게 내어 놓는다. 아마 노래를 잘 불러도 사연이 없다면 이 코너에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야기가 끝나면 무대로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는 사연을 입고 더욱 뭉클해진다. 그야말로 그들의 ‘인생 노래’인 셈이다.
무대를 마치면 진행자를 비롯한 연예인 패널들이 소감을 전한다. “노래가 너무 신이 났어요. 행복한 기운이 막 전달됩니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정말 잘 견뎌내셨네요.”, “이제 괜찮을 거예요. 정말 감동받았어요.”, “꼭 응원하겠습니다. 지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소중한 멘트들이 오고 간다. 고되고 아픈 인생들이 가장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노래를 잘하고 못하는 것, 재능이 있고 없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한 사람이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는 자체로 박수받고 응원받을 수 있는 곳이 아침마당이다.
방송이니까 다정할 수도 있다. 감성팔이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다 방송국 놈들이 하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모든 참가자에 다정함을 표현하는 일이 밥벌이라면 이 또한 쉽지 않은 밥벌이인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평범한 노래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말을 보탠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거나, 놀리거나, 충고하거나, 평가하는 일은 사실 너무 쉽고 많다. 타인의 어려움에 진심으로 공감하려 하고, 그의 고통을 헤아리려 하고, 진정성 있게 리액션해 주는 것은 정말 품이 많이 들고 귀한 일이다.
누군가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아침마당’을 추천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려 깊은 리액션을 배울 수 있다.
‘우리도 종종 아침마당 모드를 켜 두면 어떨까.’하고 생각했다. 하루 아니 일주일에 한 시간 만이라도, 소중한 사람들과 아침마당 모드로 대화하면 어떨까. 만약 아침마당 모드를 켰다면 우리가 해야 할 멘트는 정해져 있다.
‘그렇구나, 무엇이든 괜찮아. 정말 잘했어. 너를 응원할게’
그리고 문득 얼마 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도 떠오른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나의 고통이 나만의 것, 내 삶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고통이 발을 딛고 선 대지처럼 단단하게 우리 삶을 받쳐준다는 걸 알게 될수록, 더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는 듯하다. 그러니 행복을 이야기할 때는, 고통에 관해 생각하도록 하자. 삶을 긍정할 때는, 그 어려움을 인정하도록 하자.
-너는 나의 시절이다(정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