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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남이 Sep 06. 2021

‘노 키즈존’이라는 꼬리표

‘출신’ 하니 생각나는 이야기

“노 키즈 존에 대해 찬성합니다. 아이들은 울면 답이 없잖아요. 아이가 없는 사람들도 그 공간을 평화롭게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언이었다. 노답은 나였다. 그러나 이미 영상은 만들어져 버렸 돌이키기엔 많이 늦어버렸다.


4년 전 봄 어느 날이었을 거다.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진심으로 하던 일 중 하나는 독서모임이었다. 나는 모임 리더였고 내게는 모임을 흥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저자가 직접 모임에 참석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특별한 모임이었다. 그래서 조금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저자를 내가 섭외한 것은 아니었고 나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니었지만 모임의 리더로서 왠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멋진 저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그날 모임이 끝나고 우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지금 자신이 의뢰를 받아서 찍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주제와 관련해 한 명만 인터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주 짧고 부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멤버들은 딱히 인터뷰에 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분위기를 살피던 나는 “제가 해 드릴게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의 모임을 이렇게 보답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이크를 채워주고 카메라를 세팅한 저자는 내게 말했다. “국내용 아니고 해외용 다큐고요. 한국의 노 키즈 존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간단하게 해 주시면 돼요.”


‘노 키즈존’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내 의견을 말하는 일에 더 소심한 사람이었다. 페이스북에 글 몇 자를 쓰는 일도 몇 번을 고치고 고쳐서 자기 검열을 한 후에 올리곤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 옷에는 마이크가 채워져 있었고 나는 뭐든 이야기해야만 했다.


정돈되지 못한 의견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아무튼 나는 그 다큐에서  노 키즈존을 찬성하는 입장의 한 사람으로 얼굴과 이름을 저자에게 내어주었다. 저자는 그 다큐가 언제 어디서 보여지는지에 대해 딱히 상세히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아 몰라. 어떻게 되겠지. 해외 다큐라는데. 설마 누가 보겠어?’ 하며 잊어버렸다.  

 

그 후 독서모임에서 나는 평등에 관한 책을 종종 읽었고 치열한 토론을 나눴다. 토론을 할수록 내가 알던 세계가 확장되었다. 세계가 확장될수록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아래 구절을 만났을 때, 그날의 인터뷰가 불현듯 떠올랐다.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중략) 어린이에게는 성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는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어른들이 지혜를 모으는 것이 옳다. 어린이는 그런 공간에서 배우며 자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는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의 내가 너무 부끄러웠고, 다큐가 어디서 부유하고 있는지 몹시 걱정이 됐다. 이 영상이 공개되어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과대 상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인터뷰를 한 지 4년이 지나서야 저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인터뷰가 어디서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하다고, 그날 내가 한 말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고, 그 영상물에서 나를 삭제할 수 있느냐고 빈틈없이 물었다.


저자가 아주 건조하게 답을 보내왔다. 이미 제작이 완료되어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니 제작사에 직접 컨택해 보라는 것이었다. 메일의 말미에 제작사의 메일 주소와 다큐멘터리 완성본 링크가 첨부되어 있었다. 저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이제 저자를 곤란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제작사에 연락해 영상을 지워 달라는 요청 대신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은 어쩌면 미래의 나를 변호하기 위해 적는 글이다. 내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관계없이 내가 지나간 곳은 흔적으로 남는다. 고향은 주민센터에, 학교는 각종 증명서가 남는 것처럼, 한 때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박제되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성하고 있다고 그날의 인터뷰를 후회하고 있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아직 아무도 그 다큐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내가 무슨 대단한 뭐가 되려고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의 고름을 짜내고 싶은 것이다. 흉터가 남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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