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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람 Dec 18. 2017

기적의 시간 24일, 헨델의 메시아

우리는 그 음악을 통해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그 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8월 말, 더위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내에 위치한 작은 공간에 40명 가까운 남녀 고등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우리는 모두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반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한 명뿐이었다. 우리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합창단의 정기 연주회를 위해 한 달 가까이 집중적인 연습을 하고 있었다.

헨델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은 52세에 뇌내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가 운영하는 오페라 극단은 파산 직전이었다. 온천에서 요양을 한 헨델은 다행스럽게도 몸을 회복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741년 여름, 그의 나이 56세에 불멸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 HWV 56를 작곡한다. 작곡은 그해 8월 22일에 시작해서 24일 만인 9월 14일에 완료된다. 그리고 이틀 동안 관현악 편곡을 완성한다. 연주곡과 솔로곡, 그리고 합창곡까지 전부 53곡이었다. 연주시간 2시간이 훌쩍 넘는 대작이었다.


23살이었던 지휘자는 모든 파트를 직접 노래했다. 그는 열정적이었고 성격이 급했다. 우리는 지휘자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자신의 파트를 연습했다. 단원들 대부분은 악보를 볼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변하는 조성과 익숙하지 않은 대위법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연습을 하면서 노래를 익히고 부를 수 있었던 건 우리가 16살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휘자가 열정적이었거나 우리가 실력이 뛰어났거나 혹은 대단히 긍정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메시아가 그렇게 어려운 곡이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1741년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가 왕이 된 지 17년이 되는 해였다. 태어난 지 60년이 되는 환갑을 기념할 정도로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짧았다. 환갑, 우리 나이로 61세가 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50대가 되면 총기를 잃어가고 죽음에 가까워졌다. 그런 시대에 74년을 산 것도 기록적인 일인데, 환갑을 바라보는 56세에 엄청난 작품을 쓰다니, 더구나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에 4개 파트의 솔로와 4성부의 합창, 그리고 클라비어를 포함해서 최소한 12파트가 넘는 오케스트라까지. 단순하게 계산해도 40시간 이상의 연주시간이 소요되는 작품을 쓰는 건, 하루에 2시간 이상 단순히 악보를 그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악상을 떠올리고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시간과 기술적인 제약을 피해 규칙을 지키며 음악을 완성하는 데 허락된 시간은 길게 잡아도 하루 10시간 내외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이 정도가 당시 작곡가들의 일반적인 작업 속도였다는 점이다. 헨델 역시 비슷한 규모의 오페라 작품을 한 달 이내에 작곡하곤 했다고 한다. 어쩌면 어느 수준 이상의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속도로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으로 보이는 일을 일상으로 하는 셈이다.

찰스 젠넨스

우리는 2달 이상, 하루에 2시간 이상을 연습했다. 함께 모여 연습한 시간 외에도 파트별로 따로 연습을 했고, 각자 악보를 보며 개인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연주회를 해냈다. 물론 몇 명은 중간에 틀린 음정을 노래하기도 하고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지만 연주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우리 40명은 악보를 손에 들고 노래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단원들이 악보를 암기하고 있었다. 완전한 성인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청소년들의 목소리로 우리는 종교적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인간적인 드라마를 품고 있는 찰스 젠넨스Charles Jennens의 대본 속 이야기를 노래했다.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종교적인 측면은 물론, 그런 굴곡 깊은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알 수 없는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의 감동에 취해 뜻도 모르는 가사를 상기된 얼굴로 노래했을 뿐이다. 

메시아 44번 합창곡 할렐루야, 헨델 자필 악보. 하이든은 이 곡을 듣고 '저편에 신의 영광이 나타났도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 전체를 통해 절대적인 명성을 갖고 있던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 비교되면서 종교 음악가로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헨델. 하지만 그가 작곡했던 40여 편의 오페라를 뛰어넘는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이 한 편의 오라토리오는 대중의 마음과 영혼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우리는 천재 작곡가가 갖고 있던 24일의 시간보다 2배는 더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었지만 기적 같은 작곡가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 사실이 우리를 좌절하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놀라운 능력의 원천이 어디인지, 혹은 누구로부터인지, 아니면 사실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경외감으로 향하게 된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친구들이 연주회가 끝나고 눈물을 흘렸다. 그건 단지 힘든 일을 끝낸 뒤에 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청소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헨델이 하나씩 손으로 그려 넣었던 음표와 그것들이 만들어 낸 오묘한 소리의 감동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문자나 이미지를 뛰어넘는 수준의 감동이다. 사람들은 그런 감동을 경험하고 나면 비슷한 말을 한다. 


"우리는 그 음악을 통해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



 독일의 연극 연출가 클라우스 구트가 무대화한 작품이다. 죽음, 탄생, 불륜, 사랑 등 메시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삶의 이야기를 원곡 연주에 녹여냈다. 2009년 빈 극장 공연실황
헨델의 원곡을 충실히 살린 연주. 킹스 칼리지 합창단과 스티븐 클레오베리가 지휘하는 브란덴부르크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연주. 1993년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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