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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작가 Aug 09. 2021

엄마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면서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봅니다

 57과 34, 이 숫자는 ‘나이’다. 57살이 되기까지 반세기를 살며 34년의 세월동안 화성에서 살았다. 스물셋 철 없던 나는 1988년 2월 28일 결혼을 하며 능4리라는 개나리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능4리는 독재울과 개나리로 나누어졌고, 독재울은 예로부터 재주많은 사람들이 독을 짖고 살았던 곳이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살던 개나리는 개나리 나무로 울타리를 한 집이 많아 봄이면 노란 개날꽃이 피어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내가 결혼하고 살게 된 곳은 개나리마을에서도 경주김씨 종가댁으로 우리가 안채에 살고 사랑채에 시부모님이 머무셨다. 가마솥에 볏짚이며 왕겨를 풍구로 사용해 밥을 하고 웬만한 음식은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해 먹었다. 우물물을 길어서 빨래를 하고 한여름에 그 우물물은 김치나 수박등을 줄로 메달아두는 냉장고 역할도 톡톡히 해 주었다.


 남편은 85년도부터 젖소를 키우며 농사를 지었는데 동물들을에 얽힌 재미있고 황당한 이야기도 많지만 잊을 수 없는 건 삼돌이다. 처음부터 식구인줄 아는지 짖지도 않고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삼돌이는 친구 같았고 동생같고 오라버니 같았다. 논이나 밭으로 일을 나가면 앞장서서 길을 살펴주고 일이 끝날때까지 앉아서 곁을 지키다가 끝이 나면 또 먼저 앞장서서 오라버니처럼 지켜줬던 녀석이다. 2년 가까이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버님께선 개를 너무 오래기르면 손이 귀하다시며 그 가여운 녀석을 건넌말 아저씨 손에 목줄을 넘기셨고 그렇게 먼길을 떠났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켠이 아릿하게 저미고 아프다.


 5남 1녀를 두셨던 아버님은 ‘아들’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셨다. 삼돌이가 떠난 89년에 임신을 했고 9개월 정도를 먹기만 하면 토하는 바람에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아버님께서 내가 너무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계란빵을 사오셨는데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며느리 다섯 중에서 입덧을 한다고 먹을 것을 사다주신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 귀한 계란빵을 맛있게 먹었으면 좋았으련만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우당탕 툇마루를 지나 우물가에서 연신 토해냈다. 입덧으로 먹은 것이 없어도 아이 낳으러 가기 하루 전날도 밭에서 쪼그리고 냉이를 캘 정도로 몸은 가뿐했다. 그렇게 입덧을 했는데도 어떻게 자랐는지 만삭을 지나 3.4kg의 건강한 큰딸을 낳았다. 큰 아이를 낳은 2월은 방 안에 떠 놓은 물에 살얼음이 낄 정도로 오래된 기와집 안은 여린 생명이 자라기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큰 딸은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돌까지 자랐다.


 둘째를 낳았을 때는 병원 앞에서 또 딸이라고 실망하셔서 애도 보지 않고는 돌아가시며 “너희들 끼리 알아서 이름을 지어줘라”하셨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둘째아이를 유독 업고 마을마실을 다니시며 예뻐하셨다. 그 뒤로 시집온지 6년동안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이후 큰아주버님이 계신 수원으로 들어가시게 되면서 내게 “넌 이 터를 지킬 것 같구나. 너를 믿고 내어주마. 그 대신 아들 하나만 낳아다오.”하시며 남편 이름으로 집터를 돌려주셨다. 아들을 낳기 위해 두 번을 유산하고 세 번째 막내 녀석을 가졌을 땐 희한하게 입덧이 없었다. 고기가 당기고 탕수육을 정말 물 먹듯이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매일 먹어도 탕수육이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던 아들을 낳는 것을 보시더니 막내 백일이 지나자 그해 아버님께서 몸이 안좋아 지시더니 돌아가셨다. 죽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만났고 잘해드린 건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못해드린건만 가슴을 짖눌렀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때가 또 있었는데 바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중에서 8번째 피해자인 미정이 사건이 바로 내가 사는 개나리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어린 죽음으로 마을버스가 생겼고 가로등이 켜졌으며 순찰대가 생겨났다. 남편 머리카락까지 뽑아갈 정도로 남자들을 모두 조사했다.


 97년이 지나 개발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 되고 전수조사를 해가고 보상을 받은 후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한집, 두집 떠났다. 신도시 개발로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고 뿔뿔이 흩어지며 돈에 연관하여 자식들과 부모들간에 구설도 많았다. 시골살이에 젖어있던 아이들과 우리는 적지않은 공포와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아파트로 이사해서 치킨을 시켜먹었을 때 큰 아이가 한 말이다. “엄마, 우리 이제 치킨 시켜먹어도 돼요?”참 악착떨면서 아껴가면서 꽂꽂히 살면서 남에게 피해입히지 않고 부지런하게, 지혜롭게 살면서 세 아이를 모두 화성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냈다.


 46세에 이른 폐경과 갱년기가 한꺼번에 찾아와 죽을만큼 힘들었지만 이를 잘 이겨냈고 지금은 하얀 눈송이를 머리에 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스물셋 철 없던 나를 지혜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준건 그 시절 개나리 마을이었다. 그때 그 시절이 자꾸 생각나고 그리워 10년동안 수채화를 배운 지금, 산과 마을이 어우러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린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추억을 붓질하다보면 철없는 그 시절로 회자된다. 길다면 기로 짧다면 짧은 시간속에서 거대하게 커져가고 있는 화성 동탄. 난 이곳이 사람들과 어울려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강하지만 부드러운 기억들이 추억될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기를, 57세에 내가 화성에게 바라본다.






그 추운 겨울, 탈 없이 돌을 지내고 치킨을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던 큰 딸이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알고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책장에서 오래된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한 날 부터 몰래 몰래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 보았어요.


그 글들을 보면서 억척스러운 엄마의 모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되었을 때, 엄마의 일기장을 몰래몰래 보았던 그 때가 떠올랐고 '아, 나도 우리 딸이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적어 두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야금야금 일기를 썼습니다. 그렇게 쓴 글이 모여 <엄마를 행복하게 하는 자존감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어요.


책을 쓰면서 나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엄마도, 엄마의 이야기를 세상에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딸이 '엄마도 책을 한번 써봐!' 라고 말 할때는 '에이 무슨~' 하며 손사레 치던 엄마가, "엄마, 내가 도서관에서 재미있는 공모전을 하나 봤어." "무슨? 공모전?" "책 만드는 작가를 뽑는 공모전이야. 엄마 한번 해 볼래?"  '에이~ 내가 무슨~' 이라고 말할 줄 알았던 엄마가 "그래? 그럼 한번 해 볼까?" 라고 얘기했고 그렇게 모녀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펜글씨를 딸의 일기장에 차곡차곡 적어나가봅니다.




축하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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