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글감이다
" 그렇게 재밌어? "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담겼다. '앗! 큰일났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비상상태다.
시작은 이랬다.
도서관에서 협성독서왕 선정 도서인 '눈부신 안부'를 읽고 있었다. 백수린 작가님의 첫 장편소설이자 파독 간호사의 삶을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이 엄마와 친했던 파독 간호사중 한 명인 선자 이모의 첫사랑이 누군인지 찾아 나가는 과정을 꽤나 긴 호흡으로 서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의아하고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후반부로 갈 수록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하며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진다. 내가 푹 빠져 읽고 있었던 부분은 바로 이 후반부였고, 나는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주인공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따라 책 속에 깊숙히 빠져 있었다.
'남편한테 대출증 있으니까, 대출해서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아이들이 대출하겠다고 쌓아둔 책을 뒤로하고, 둘째 아이의 짐과 둘째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휴, 이제 살 것 같다.' 도서관 안이 너무 추워서 옹그리고 책을 읽던 나는, 밖에서 나를 감싸는 뜨거운 기운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아이들 책을 대출해서 나오기까지 나는 선 채로 책을 읽었다.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마지막이 주는 긴장감은 대단했다.
남편이 아이들 책을 대출해서 나오는데 갑자기 문에서 "삐 ㅡ"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서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남편은 빌린 책들과 함께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바로 나오지 못하는 그때까지도 나는 책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시간이 좀 걸리나보네~'정도로만 생각했다. 주인공이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거의 찾을랑 말랑 하는 그 순간을 손에 땀을 쥐어가며 읽고 있었다.
무엇인가 처리하고 도서관에서 나온 남편이 " 책이 그렇게 재밌어? "라고 말한 다음에야, '아뿔싸!' 정신이 들었다. 나 혼자 책을 읽겠다고 푹 빠져있는 사이에, 혼자서 아등바등 했던 남편의 말을 듣고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한 구석에서 불편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 나한테는 도서 대출증이 없고, 자기가 대출해서 나오면 되는거잖아. 내가 가서 도와줄 일이 있었던거야? 아니, 그러면 도와달라고 말 하면 되지 왜 짜증을 내는 거지? '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싸우자는게 된다. 푹 빠져 읽던 책에서 갑자기 현실로 빠져나왔다. 내가 잘못한 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태도에 불편한 마음이 일었다. '이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그런데 마침, 빛쓰다 글쓰기 모임에서 시작한 그날의 필사 문장이 불편한 마음을 더 건드렸다. '글 쓰는 사람은 오늘을 더 잘 살아내게 된다. 쓰다보면 알게 된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사실 내 삶의 변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라고 필사문장 밑에 내 생각을 썼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이 말을 내 삶에서 실천할 순간을, 글을 쓰자 마자 마주하게 되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 이었다. 남편도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데, 자기 좋다고 책만 읽고 있는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남편의 감정을 짚어가다 보니, 나에게 도움을 부탁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은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6월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바쁜 달 이었다. 손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같이 치던 배드민턴도 안 하고, 여러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하느라 새벽에 일어나고 늦은 저녁까지도 할 일이 있다며 분주했던 터라 남편과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교감하는 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이었는데, '바쁜일만 끝내고 나서'라는 말로 미루고 또 미뤄두었다. 무언가에 푹 빠져있을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파고드는 성향탓에,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참아왔던 남편이 아마 그 날도 참다 참다 섭섭함이 말로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다음에 내가 또 너무 무언가에 빠져있어서 눈치 없이 행동하는 상황이 생기면, 꼭 말 해달라고 부탁 해야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우리 얘기 나눌 시간이 너무 없었지ㅜㅜ 오늘 밤에 맥주 한 잔 해요 우리!' 다음날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ENFP는 말 해야 안다고 하더라. 말 안 하면 모른다고.' 아! 내가 남편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을 남편의 말로 듣게 되었다. 내가 필요할땐 언제든 말 해 달라고, 나도 노력해 보지만 말하지 않으면 잘 모를 수 있다고 말이다.
[ 눈부신 안부 ]의 주인공 해미의 마지막을 읽으며 앞에서 쌓아올렸던 이야기가 절정에 다랐을때, 내 삶과 오버랩되어 마음에 울림이 더 컸다. 독후감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책으로 인해 생긴 에피소드를 활용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미의 성장 과정에서의 경험들이 내가 엄마, 아내로의 성장과정에서의 경험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쓰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글감이다. 말 해줘야 아는 '나 '라는 사람에게, 삶도 두런두런 얘기를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