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aL, 랩교
"즉흥 교 랩교, 프리스타일 랩 교, 즉흥 교 랩교, 프리스타일 랩 교!" 고3쯤이었을거다 아마 이 야만인들이 주술 외우는 음악을 처음 들어본 것이. 친구들 중 랩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노래방에 가면 항상 힙합 음악 랩 음악을 부르곤 했다. 그리고 한 동안 바로 이 '허니 패밀리' 주술을 외우고 다니곤 했다. 그렇게 내게 처음 다가온 랩교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조금씩 내 플레이리스트 자리를 넓혀갔고 이제 내 플레이리스트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오늘 북과바디 갤러리를 찾은 것은 상당히 즉흥적인 일이었다. 오후 12시에 일이 끝나면 선릉역에서 수인분당선을 타고 강남구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 중화역에 3시까지 이동하는 나의 동선 상에 갈만한 전시회가 하나 있었다. K현대미술관 전혁림 전시회였다. 그런데 이게 왠걸 오늘따라 갑자기 일이 1시간 늦게 끝나게 되었지 뭔가! 오후 1시에 일이 끝나는데 전혁림 전시를 잠깐만 들르기에는 너무 아쉬운 전시라서 '강남구 전시회'를 새로 검색해 보았다. 오! 강남구청역 근처에 그래피티 전시가 있구나. '북과바디?' 이름이 좀 이상한데? 어쨌든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그야말로 즉흥적으로.
여러 에너지 넘치는 작품들을 돌아보던 중에 조금은 심심한 듯한 글씨 위주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랩교' 영어로 Rap과 한자로 '가르칠 교'자를 더한 작품. 작가는 허니 패밀리의 '랩교'를 듣고 이 작품을 그렸다. QR코드를 열고 음악을 플레이 해 보았다. 오오오오 20년 전의 그 음악이 나온다. 야만인 주술사의 그 랩. 내가 랩을 가르쳐 주겠다며 한국인이 한국어로 랩을 이렇게 하는거야 가르쳐 준다. 그래 랩교 이전 힙합씬은 영어 추임새를 해야 랩인 것처럼 풋쳐핸접 마잌어쳌 원투원투를 해야 랩인 것처럼 뭐가 랩이고 누가 랩을 하는 건지 왜 하는 건지 뿌리 없는 플라스틱 꽃을 꽂아 놓고 "예쁘지? 이게 힙합이야" 했다.
나는 랩과 힙합을 좋아한다. 이유는 이렇다. 솔직하다.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문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문화. 돈을 사랑하면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성을 사랑하면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신을 사랑하면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각자가 자신이 숭배하는 것의 예언자가 되어서 자기 신을 자랑한다. 아닌척 하는 자는 요즘 말로 "짜친다" 평가를 받고 '구린 것'으로 평가 받는다. 각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진실되게 말하고 말한대로 살고자 한다. 그리고 생각하고 말하고 말한대로 사는 래퍼를 최고로 친다. 물론 각 래퍼는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언어의 그림을. 자기 방식대로.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
요즘 랩과 힙합 문화가 상업화 되면서 힙합 문화의 이런 멋을 가리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한다. 물론 나는 힙합 씬이 대중화되고 커지면서 상업화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랩과 삶의 진정성 진실성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미지와 랩의 화려하고 자극적인 요소로만 어필하려고 하는 래퍼들에게 나는 피곤함을 느낀다. 그 드넓은 비트의 캔버스를 내가 최고라는 공허한 자기자랑으로 꽉꽉 채워넣고 화려한 색채와 기술들을 보라하니 나는 무엇을 보고 쉴 곳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성탄절 거리에 캐롤이 빠진 것처럼 힙합 음악 속에서 사랑과 평화, 저항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으니 어디서 우리가 함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난 주일 교회에서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말했다. "여보, 오늘 당신 설교 좋았는데, 당신 삶이 빠져있어. 그래서 당신은 어떤 경험이 있는지 어떻게 했는지 그런걸 말해줬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 나는 살짝 마음이 상했다. 조금 서운하다. 이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내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할 이유를 조목 조목 이야기 했지만, 나의 마음은 솔직히 조금 찔렸다. '그렇지 사람들은 삶이 들어간 이야기를 듣고 싶지.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사람들이 즉흥 랩 프리스타일 랩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미리 하나하나 준비된 언어 개념적인 언어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미처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진실만을 말하고 거침없이 진리를 말하는 예언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아직 나의 삶을 통과한 말씀을 전하는 것에는 여전히 서투르고 망설여진다. 많은 시간 말씀을 연구하고 곱씹고 준비하여 설교문을 작성했고 사람들에게 전하지만 매번 말씀이 나를 통과하도록하고 말씀이 내 삶이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문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래퍼, 아니 진정한 예언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말과 삶이 현장에서 결합한 바로 그 사람, 진짜 예언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