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12(팔복) & 만종(장 프랑수아 밀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함께 보면 좋은 성서본문: 시편 100편, 빌립보서 4:4~20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주일이지요. 여러분의 올 한 해는 어떠셨습니까? 하나님께 많이 받으셨습니까?
저는 ‘감사’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이 그림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1815년부터 1875년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그림입니다. 원래 제목은 ‘삼종기도’인데요,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삼종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교회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을 세 번 울립니다. 종을 세 번 울린다고 해서 삼종기도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기도를 드리지요.
이 삼종기도에는 보통 정해진 기도문을 드리는데요, 기도문의 모티브는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수태고지 사건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알리고, 마리아는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 성육신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거쳐서, 이루어진 부활의 사건에, 우리 역시 동참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바로 삼종기도의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그림은 그 중에서도 바로 저녁기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 상단의 하늘을 볼까요? 하늘이 빛을 흐리고 있고, 어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지평선 따라, 저 멀리 교회 종탑이 보이지요? 교회 종소리가 세 번 울립니다. 이 소리에 새들이 깜짝 놀라 하늘로 날아가고 있지요. 그런데요. 저녁기도, 즉 만종 때에는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친 것을 감사하는 의미를 담아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림 중앙에 서있는 두 남녀 농부는, 아마도 밭에서 정신없이 일하면서 감자를 캐다가, 만종 소리를 듣고서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난 것을 알았을 겁니다. 감자 괭이를 밭에 박아 세워놓고, 그 자리에 서서 감자 바구니를 앞에 놓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하루를 마치는거죠. 아마도 이런 기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 이 척박한 땅에서도 감자를 거두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자를 심었고, 땀을 심었지만,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공급하심 덕분에 오늘도 이 감자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한 해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참 녹록지 않은 하루 하루를 살아내셨어요. 이 고비 고비를 어떻게 넘어갈까 싶은 순간들도 있으셨을 겁니다. 과연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한 순간들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잘 넘어 오셨고요, 열매도 수확하셨어요. 매일 먹을 양식이 부족하지 않았고요,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을 적당하게, 그리고 신기하게 채워졌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요, 추억 가득한 순간들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 돌보아주시고 공급해 주신 것들을 잘 세어보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여러분의 인생을 만종으로 그려내시길 소망합니다.
그런데요, 저는 사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뭘 감사해야 하지?
지금 내 처지에서, 지금 내 인생 바구니가 텅텅 비어있는 것 같은데?
여러분 중 저처럼 이런 생각 드시는 분 있지 않으세요? “나 뭘 감사해야 하지?”
제가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팔복’이 떠올랐어요. “아, 내게는 팔복이 있지!”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예수 가르침의 핵심이 팔복이지요?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지요. 예수님께서도 산에 올라 가십니다. 거기서 제자들과,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삶을 가르쳐주셨죠.
그런데요, 그 산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 무리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가득찬 인생 바구니를 놓고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텅 빈 바구니, 볼품없는 감자 몇 알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바구니, 썩은 감자만 굴러다니는 바구니였을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의 주권을 로마제국에 빼앗기고, 압제당하며, 가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지요.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득세하며, 죄악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되고, 활개치는 세상을 경험하면서도, 이를 뒤엎을 힘이 없어, 그저 슬퍼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좀 다를까요? 수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요. 가끔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역시, 이 맘몬과 바알, 몰렉의 권세에 무릎 꿇고 삶의 소소한 이익을 챙깁니다. 기근은 면해야지, 먹고는 살아야지 하면서 불의에 눈 감고, 거짓을 옳다 말해주며, 이기기 위해선 친구를 밟고 올라서고, 죄악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 뒤에, 줄을 서서 따라가지요. 오히려 하나님 백성답게 양심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면, 우리는 종종 내 텅 빈 바구니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국 요지경 같은 세상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이걸 뒤엎을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한 가슴을 부여잡고 그저 숨 죽이며 울곤 하지요.
그런데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이예요.
복되어라!
심장을 하나님께만 건 사람들아!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리며 돌보고 계신다!
원래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잖아요?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 영으로 가난한 자’가 과연 누구일까요? 자기가 소유한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자, 다른 그 어떤 권세도 의지하지 않는 자, 그러면서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입니다(마태복음, 양용의, 196). 그걸 루터의 말로 바꾼게 바로 ‘심장을 하나님께만 건 사람들’이예요.
루터는 대교리문답 십계명 제1계명이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를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매달려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당신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우리에게 바른 믿음과 진정한 신뢰를 요청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참되고 유일한 신인지 올바로 판단하여 마음을 오직 그곳에만 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계속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오직 나만 너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결코 다른 신을 찾지 말라.” 즉 “네게 필요한 선한 것과 네가 소망하는 것, 그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네가 불행과 궁핍 가운데 있을 때 내게 와서 매달리라. 그러면 내가 반드시 풍족히 채워주며 모든 환란에서 도울 것이다. 다만, 네 마음을 다른 어떤 것에도 두지 말라!”(대교리문답, 마르틴 루터, 최주훈, 53)
예수님은 팔복의 첫 번째 복을 선언하시면서, 녹록지 않은 삶을 버티고 전쟁같은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 1계명을 버리지 않고, 굳게 붙들고 살고 있는 제자들과 여러분에게,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며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릴 버리고 떠나 계신 것 같이 느끼는 바로 그 때에, 같은 하늘 아래 이 땅 위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시지요? 뜬구름 위가 아니라, 하늘 아래, 여기 이 땅, 척박한 땅 위의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4절에서 6절입니다.
복되어라!
황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백성들아!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복되어라!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아!
하나님 나라가 너희 삶을 지탱해 줄 것이다.
복되어라!
세상의 죄악과 불의로 고통받으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목빠지게 고대하는 백성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정의에 배부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현실을 바꿀 능력도 없이 그저 공허한 선언만 남발하고 뒤에서 뒷짐 지고 서있는 무책임한 분이 아니셨지요. 돈과 권력없이도 하나님의 아들답게 고난받고, 죽는 기개를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이 울고 있었을 때, 힘이 없고 가난해서 무력감을 느꼈을 때, 죄악과 불의가 판치는 이 세상 속에서 마음이 타들어갔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그 험난한 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걷고 계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혼자있는 것처럼 느꼈을 그 때에, 사실 주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소망을 보여주셨지요. 부활의 소망은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 날, 저와 여러분의 슬픈 마음은 온전히 위로받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 나라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튼튼하게 지지해 줄 것입니다. 더는 삶의 토대가 흔들려서 불안을 느끼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죄악과 불의에서 자유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밀레의 ‘만종’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 밀레의 만종을 찬찬히 보면서 그저 일상적인 감사를 그렸다는 해석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황혼은 그저 아름다운 노을을 그렸다기엔, 빛이 꽤나 어둡고 흐려서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고요, 인물들은 빛을 등지고 서서 굉장히. 어둡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기도도 가볍게 하루를 끝낸다기엔, 너무 엄숙하고 장엄하다고 할 정도로, 진지하게 손을 모으고 있고요. 밭에는 잡초들이 여기저기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밭 일이 녹록하지 않았겠구나, 어쩌면 밭에서 소출이 많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농부들 발 밑에 놓인 바구니를 보면, 감자가 가득 담겨있지는 않아요. 하루 종일 일한 것 치고는 바구니가 너무 비어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뒤에 있는 수레에 든 게 감자인지 비료인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밀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농부들의 바구니는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정말 농부들은 단순히 하루 농사를 감사하고서, 기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밀레는 그저 하루 하루 주어진 땅에서 땀 흘려 일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농부들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린 것 뿐일까요?
이 ‘만종’이 그려지던 1857년부터 1859년 어간의 유럽 경제는 그야말로 처참했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는 기근과 경제 공황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프랑스 농민의 대다수가 극빈층이었지요. 온 세상이 가난한데, 주구장창 농민만 그려대는 화가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이 시절 밀레의 삶도 농민들의 삶처럼 척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당시 밀레가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제가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돈을 벌면 무조건 아이들을 먹여야 합니다.
제 마음은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심한 편두통과 함께 머릿속은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농민의 삶을 그린 밀레의 삶 역시 농민의 삶처럼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밀레가, 척박한 삶의 현실을 갈아 엎기 위해서, 정직하게 땀 흘리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비어있는 감자 바구니 같이, 이 땅의 절망적인 하루 하루를 그저 버텨나갈 수 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일개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불의한 세상 속에서 정직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런데, 밀레는 그 힌트를 그림에 숨겨두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두 농부의 온 삶을 건 기도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선 감자 괭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빼앗기고, 죄악과 불의라는 인생의 잡초들과 싸우면서, 가난의 열매를 먹고, 또 눈물 삼키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고백의 기도를 오늘도 심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의 몸짓인 것입니다. 맘몬과 바알, 몰렉을 이기는 힘인 것이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 팔복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팔복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날,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 온전히 임하는 그 날은 먼 훗날에 가서야 만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때까지 그저 멍하니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이 땅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으로, 더 가까이 끌고 들어와야 합니다. 기도로 말입니다. 이 척박한 삶의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 심장을 하나님께 걸고 기도할 때, 우리의 슬픔을 감싸 안는 위로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요. 때때로 우리의 빈 손을 채우시는 도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죄악과 불의가 득세하는 세상 속에서, 정의와 자비의 손길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기도와 함께 감자 괭이를 들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내가 보냄받은 이 척박한 삶의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개간해 나가야지요. 가정을, 직장을, 교회를, 그리고 이 나라를 개간해 나가야 합니다. 정직한 농부처럼 말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정의를 이루기 때문에 미움받습니다(마5:7-12). 팔복의 나머지 부분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자”라는 것이지요.
온갖 먼지와 흙탕물을 뒤집어 쓸지라도,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할지라도, 감자 괭이를 들고 내가 보냄받은 소명지를 하나님 나라로 개간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의 빈 손에 채워질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십시오. 예언자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받은 복을 세어봅시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 인색하지요. 하지만 그 분은 저와 여러분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편 100편).
혹시, 인생의 바구니가 비었습니까. 여러분 삶의 밭이 척박합니까. 기뻐하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팔복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여러분의 삶에 심으셔야 합니다. 처녀 마리아가 고백했던 것처럼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종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이것을 붙잡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하늘로부터 오는 실제적인 위로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시편 100편).
여러분의 손에 들려진 감자 괭이를 들고서, 힘내시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척박한 삶의 현장을 개간하는 겁니다. 하루 하루를 정직하게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내는 겁니다. 여러분의 손 때가 묻고 땀이 심겨진 바로 그 곳에, 언젠가는 팔복의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겁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곳에 풍성히 결실한 하늘의 열매를 상급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열매를 내다보며, 미리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4:7). 아멘.
윤석기 목사 올림
설교에는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면 밀레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기도로 하늘을 바라보고, 괭이질을 하듯 붓질로 현실을 갈아엎은 밀레의 삶은 과연 열매를 맺었을까요?
아까 잠시 읽어드렸던 밀레의 편지 뒷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정말 내게도 찾아올지 모르겠습니다.”
밀레의 기도 때문이었을까요? 젊은 시절 극심한 가난과 고난을 겪었던 밀레는 노년에 이르러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지요. 그는 자신이 받은 화가의 소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종종 밀레의 그림을 보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외감에 빠지곤 하지요. 그러한 경험이, 사실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짚어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였지요. 이런 글을 남겼는데요, 읽어드릴게요.
“밀레는 하얀 빛을 가진 사람이고 어느 누구보다 훌륭해. 밀레에게는 복음이 있거든. 밀레가 그린 그림이 훌륭한 설교와 무엇이 다르냐? 제법 괜찮다는 설교도 밀레의 그림과 비교하면 검게 보여”
밀레의 그림은 고흐에게 하나님 나라의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이어 받아 고흐 역시 하나님 나라의 색채를 가져오는 화가가 되었지요. 고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박수근 역시 12살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서 충격을 받아 하나님께 밀레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지구상의 수많은 이발소와 학교들,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고 돌아,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하나님 나라의 감동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밀레가 받을 상이 무엇일까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언자의 상입니다.
밀레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