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 말씀] 나귀 탄 왕

막11:1-14 &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제임스 앙소르)

by 나비

성서 본문: 마가복음 11장 1-14절

(예루살렘 입성, 무화과나무 저주)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함께 보면 좋은 성서 본문: 스가랴 9:9 창세기 49:10-11





말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이 바뀌었어요. 마태의 해에서 마가의 해로 바뀌었습니다. 교회에서 만큼은 벌써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것인데요, 앞으로 한 해 동안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서를 보시게 될 겁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날이고요, 이 날에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요, 저희는 오늘 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씀까지 함께 읽었지요? 바로,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입니다. 성경이 본래 장 절 구분도 없고 단락구분도 없잖아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의 의미를 알아보려고 앞뒤 맥락을 살펴보는데, 저는 이 무화과 저주 사건이 뭔가 좀 이상한거예요.


도대체 무화과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저주를 하셨을까요?


제철도 아니어서 열매없이 잎사귀만 있는게 당연한 건데, 굳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라고 무화과 나무에게 말씀하셨어요. 한 마디로 ‘나무 너! 앞으로 열매맺을 일 없어!’ 저주하신거죠. 예수님이 너무 배가 고프셔서 분노 조절이 안되시는 거였을까요?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거였을까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전날 있었던 사건,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에 실마리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죠. 함께 가는 사람들이 엄청 환호를 했어요. “하나님이 보낸 왕이 오셨다! 다윗 왕조가 부활하고 나라가 회복된다!” 흥분했죠.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쭈욱 한 번 둘러보시기만 할 뿐, 아무것도 안하시고 그냥 나가십니다. 숙소가 있는 베다니로 자러가셨어요. 그리곤 다음날 베다니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는 길에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신 거예요. 이상하지요?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 이상한 점을 하나 하나 추적해보겠습니다.




첫번째 단서는 ‘무화과’입니다. 보통 무화과 나무와 포도 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하지요. 예레미야 24장은 이스라엘을 무화과에 비유합니다. 호세아 9장도 이스라엘을 무화과와 포도에 비유하지요. 이사야 5장은 이스라엘을 포도에 비유하면서 ‘공평과 정의’이라는 열매를 기대했지만 ‘포악과 부르짖음’을 맺었다고 고발하면서, 멸망을 선포합니다. 이렇듯 무화과 나무와 포도 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무화과 열매와 포도 열매는 ‘공평과 정의’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무화과 나무가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겉모습은 번드르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공평과 정의’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예배생활과 교회생활로, ‘나는 하나님 백성이야’ 자부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관심있는 삶에는 빵점이었다는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를 외면 했다는 것이지요.




두번째 단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도보로 갈릴리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오시다가, 예루살렘 맞은 편 동네에 도착하셔서 굳이 나귀를 타기로 하셨어요. 이상하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저 교통수단으로 나귀를 이용한 거라면 먼 길을 나귀를 타고 오다가, 이제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려서 도보로 천천히 걸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앞에서 굳이 나귀를 타신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마가복음, 박윤만 p.766).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하신 것이죠. 스가랴 9:9을 염두에 두고 말입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이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왕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왕일까요?


공의로운 왕입니다. 공의롭다는 건 무슨 도덕책이나 법전같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예요. 본문의 원어는 ‘차디크’인데,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강자들의 불의한 횡포로 고통받는 약자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고 건져낼 때 쓰는 단어예요(칭의와 정의, ‘성경에서 칭의와 정의’, 김창락, p.71).


그런데 이 왕이 공의를 행하느라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이 왕은 공의를 행하느라, 고통받는 약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섬기느라 고난을 받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근주, p.597-598). 참고로, 개역개정 성경에는 왕이 구원을 베푸는 것으로 번역을 했지만, 사실 여기서는 수동태로 번역하는게 더 적절하거든요.


그래서 이 왕이 섬기는 대상은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곤고한 사람들’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전에서 ‘곤고하다’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니까 ‘어렵고 고생하다’라는 뜻이더라고요. 왕이 섬기는 대상은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더 엄청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왕이 섬기는 방식이예요. 그건 바로, 섬기는 대상과 같아지는 것이더라고요. ‘곤고한 사람’이 되는 것이예요. ’겸손하여 나귀를 탄’다고 했잖아요? 여기서 ‘겸손하다’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 ‘가난하다, 곤고하다, 가련하다’로 번역되기도 해요(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근주, p.598). 왕은 ‘곤고한 사람들’처럼 ‘곤고한 사람들’이 사는 길을 따라 살기로 합니다.


물론, ‘겸손하다’고 번역할 수도 있죠. 힘과 위엄의 상징이자 군사력을 나타내는 말을 타지 않고, 군대와 상관없이 남녀노소가 타는 나귀를 타셨잖아요.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힘과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겸손과 평화로 다스리겠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근주, p.598).


이제 두번째 단서를 추적해서 얻은 결론을 종합해 보지요.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보내신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곤고한 사람들을 섬기고 건져내기 위해, 곤고한 사람들이 타는 나귀를 타고 길을 걸으셨고, 곤고한 사람이 되셨지요. 공의에 굶주린 채, 예루살렘에 도착하셨고, 그 열매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세번째 단서는 창세기 49장 10-11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서는 야곱이 자기의 열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축복을 하는데요, 10절과 11절에는 유다에 대한 축복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도 나귀와 포도나무가 나오는데요, 읽어드릴게요.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규가 자신에게 속해있는 그분이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유다 지파에 왕이 올 것인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맨다고 하지요? 엄청난 풍요와 평화, 번영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창세기 주석, 브루스 월키, 캐시 프레드릭스, p.1104). 생각해보세요. 나귀를 값비싼 포도나무 옆에 매어 놓으면 포도를 다 먹어치우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풍요롭고 평화로운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축복이지요.


그런데요, 우리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둘러 본 예루살렘 무화과나무에는 나귀는 커녕 사람조차 먹을 열매가 없었어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제 이 예루살렘이라는 무화과 나무에는 더 이상 백성들이 기대할 것이 없구나, 이제는 더 이상 고쳐 쓸 수도 없겠다, 희망이 없다’ 판단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선 결심하셨을 것 같아요. 친히 포도나무가 되실 결심을 하셨을 것 같아요. 피 땀 눈물의 길을 걸어가더라도 이 나귀를 먹이겠다고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더라도, 저와 여러분과 같은 곤고한 사람들의 왕이 되어 끝까지 책임지시겠다고 결심하셨을 것 같아요.


이제, 예수님의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단서를 전부 살펴보았습니다. 종합하자면, 무화과 나무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지도층이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삶에는 무관심한 채 살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곤고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섬기고 건져주기는 커녕, 그들을 내팽겨치고 오로지 종교생활에만 몰두한 채 살았던 것이죠. 곤고한 백성들을 먹일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왕을 보내셨지만 그 왕을 영접하고 섬기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은 곤고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거든요. 곤고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왕도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축복은 나귀를 타고 옵니다. 그리고 저주도 나귀를 타고 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 보셨듯, 저와 여러분의 삶을 둘러 보고 계십니다. 그 나귀를 먹일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내 모습을 똑바로 들여다 보면 참 부끄럽지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마주보기 부끄러워서 눈을 돌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잎으로 잔뜩 얼굴을 가린 채, 정작 이렇다 할 열매가 없는 나무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 공의를 행하며, 곤고한 사람들을 건져내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말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저와 여러분 앞에 수 차례 오실 때에, 곤고한 사람을 타고 오실 때에, 내어 드릴 열매가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얽어매는 것들이 있지요. 세상과 교회에서 더 큰 자가 되어 권세를 부리기를 바라는 열망,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더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욕심,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삶에 대한 추구. 때로는 이러한 것들 때문에, 곤고한 사람들을 건져내고 섬기는 삶으로 모험을 감행하기를 주저합니다.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맛보는 삶을 주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위로가 되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우리와 비슷해서 참 위로가 됩니다.


오늘 본문 전에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으실 거라고 진지한 얘기를 세번째 하시는데요,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리를 청탁하고 있어요. 왼쪽 자리, 오른쪽 자리요. 읽으면서 참 저랑 비슷한 것 같아서 위로가 됩니다. 주님, 목사 자리를 주세요! 주님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주세요! 주님 교회 장소를 주세요! 야고보와 요한이 참으로 자리에만 관심있었던 저같아서 위로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참 웃기고 부끄럽기도 하고요. 자리에 매여 있었던 걸까요? 여러분은 무엇에 매여 계십니까?


다행히도 소망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마가복음 11장 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나귀처럼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처지를 다 알고, 저와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풀어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소명이라고도 하지요,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여러가지 통로로 오지요. 기도 중에, 꿈과 환상 중에도 오고, 상황이 말해주는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나귀를 부르러 온 것처럼, 사람을 통해서도 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막11:3)” 다른 말로 하면, “너, 내 나귀가 되라.”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전달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주인되셔서, 우리 인생에 탑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시고, 사용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길을 이끌테니, 삶을 맡기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말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얽어매어 온 보잘 것 없는 것들을 하나 하나 친히 풀어 주십니다. 해체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막11:4)” 나귀는 어쩌면, 제자들이 자기한테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자기를 해방하는 건지, 해꼬지 하는 건지 판단이 안섰을 겁니다. 한번도 풀려본 적도 누굴 태워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처음 겪는 상황에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의 옛 주인이 아닌, 제자들이 자기를 어디론가 끌고 갈 때, 더더욱 두려웠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자, 그 혼란은 이내 끝이 납니다.


나귀는 해방되었고, 드디어 보람과 의미가 가득한 삶을 살지요. 예수님을 태우고 그분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길을 갑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곤고한 길이지만 동반자되신 왕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전달자가 됩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의 길을 따르던 제자들 역시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기꺼이 ‘왕의 나귀’가 되어 그리스도의 전달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앉을 자리에 자기들의 겉옷을 깔아서 안장을 대신하도록 했고요, 길에도 겉옷과 잎이 무성한 가지들을 깔아 기꺼이 레드카펫을 연출한 것이지요. 사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례가 있는 것인데요, 열왕기하 9:13에서 한 선지자가 예후를 왕으로 선포하자 사람들이 그의 가는 길에 ‘겉옷’을 깔고 그를 왕으로 선포했고요, 또 유다 마카비가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감사의 노래를 불렀어요. 제자들이 이런 선례를 따라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벌인 것입니다(마가복음, 박윤만, p.771-772).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주되심을 인정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예수님께 해방을 간구합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요,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달라는 의미와 이방의 압제에서 건져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간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할 것을 간구하는 한편,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릴 것을 기대하며 찬송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제자들 역시 흠이 많고,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따른 건 아니었지만, ‘왕의 나귀’가 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자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책임지시고, 함께 걷기로 하셨으니까요.


이점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소망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쁘신 그분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임하고 있을 계시지 않을까요? 저는 그럴거라고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서 본문과 관련된 그림 한 점을 함께 보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스크린샷 2023-12-03 오후 10.33.50.png 제임스 앙소르,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 1888, 252.5 x 430.5cm, 폴 게티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주보 앞 면에 실린 그림인데요, 제가 따로 A4 용지에 인쇄해드린 그림입니다. 실제로는 가로 4미터, 세로 2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이예요.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가 그린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에 입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지오토 디 본도네’를 비롯해서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려온 주제였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왼쪽에서 오른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문을 향해 들어가시는 장면을 그렸지요. 그런데, 이 제임스 앙소르의 그림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나요?


네, 화면 중앙 수많은 군중들의 행진 뒤쪽에서 조그맣게 그려져 있지요. 자세히 찾아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방향으로 가시나요? 네, 맞습니다. 작품을 보는 관객쪽으로, 내 쪽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오고 계시지요.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작품을 보는 우리의 위치가 작품 속의 군중들을 조금 묘하게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예요. 통상적인 군중의 위치보다 위쪽 높이에 있는 것이죠.


사실, 미술사가들의 관점에서도 이 작품의 정확한 해석은 굉장히 어렵다고 합니다. 제임스 앙소르가 이 작품의 해석과 관련해서 별로 단서를 남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몇가지 알려진 것들이 있지요. 제임스 앙소르는 무신론자로서 성경을 설명하거나 그리스도를 높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점, 성경 본문의 이미지를 가져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회상과 자신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는 점, 당시 브뤼셀 사회의 자본주의로 인한 병폐를 꼬집고자 했다는 점, 미술 평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그리스도에 빗대고 있다는 점, 카니발 가면을 쓴 듯 진실하지 않은 삶의 태도로 허위와 위선 속에 살며, 헛된 욕망에 이끌려 허우적 거리며 몰려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 등이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저는 오늘 이 그림을 그저 오늘의 말씀과 관련하여 이렇게 읽어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들어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돈과 욕망에 이끌려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입니까? 진실된 삶의 태도가 결여된 채 힘과 권력에 취한 사람들입니까?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마음의 눈을 뜨고 그들 뒤에 가리워져 있는 나귀 탄 왕을 보셔야 합니다.


진실된 마음과 공의를 행하며 여러분을 향해 뚜벅 뚜벅 나귀 타고 오시는 그 분의 걸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곤고한 사람이 되어 오시는 그분 주변에는, 그분을 향해 콧대를 높이 세운 채, 초라하다 비웃는 이들도 있지요. 그러나 그 분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 분이 오고 계십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해 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곧 여러분에게 요구하실 것입니다. “먹을 무화과 열매가 있느냐?”


여러분은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그 분에게 내어드릴 열매를 준비해야 합니다.


곤고한 사람을 먹일 공의와 긍휼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내어드릴 것이 준비되지 않았습니까? 제자라고 하기에 부족한 나를 보면 낙심되지요.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너, 내 나귀가 되어라”


그분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고, 여러분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얽매인 모든 욕망과 죄악에서 여러분을 해방하시고, 여러분을 왕의 나귀답게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곤고한 왕을 태우고, 그리스도의 전달자가 될 것입니다. 다소 곤고한 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요. 때로는 힘든 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그리고 함께 기대하며 기뻐합시다. 왕께서 저와 여러분의 걸음 걸음을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며, 위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설레임을 가득안고 한 주 동안 하나님 나라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4:7). 아멘.


윤석기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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