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2:1-14(혼인잔치 비유) &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이바노프)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떠십니까? 오늘의 교회력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4절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앞에서 '결혼식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시는데요,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한 사람, 곧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푼 왕과 관련한 경우와 같다" 하나님 나라는 결혼 잔치를 베푼 왕과 같다는데요, 저와 여러분의 삶은 과연 이 잔치 자리에 와 있는 걸까요? 잔치와는 조금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 삶에 소망을 주시고 모범을 보여주셨지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시고, 고결한 삶을 살아갈 힘을 주시며, 서로를 섬기라 가르쳐주셨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뤄나가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어깨동무에 우리 걸음을 맡기기 보다는, ‘그건 예수님 이야기일 뿐이야.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사는거지. 현실은 다른거야.’라면서 자조하지는 않은지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성전 권력 앞에서, 변하지 않는 삶의 현실 앞에서, 변함 없었던 사람들의 무정함 앞에서 체념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우리 삶에 권위를 주장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권위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상을 뒤엎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지요. 그럴 권위와 자격이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에게 권위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수님! 그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 제 처지가 되어 봤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제 삶에 권위가 있습니까?! 그런 말 하실 자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예수님은 역으로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권위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물어보시고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면 본인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종교지도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요한을 안 믿었냐' 책망받을 것이고,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던 백성들의 반발을 살게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 끝에 “모르겠다"라고 얼버무린 것이었죠. 세례 요한을 예언자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세례요한이 예언자가 아니라고 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인지, 그게 정말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종교지도자로서 자기 권위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 자기들이 그간 지켜온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죠.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거죠. ‘모르겠다고? 너희 정말로 내 권위가 어디서 온 건지 알고 싶은게 아니구나. 그러면 내가 말해줄 이유가 없지.’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친절하시게도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첫번째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두 아들의 비유이고요, 두번째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결혼식 잔치의 비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식 잔치의 비유를 ‘권위의 문제'라는 맥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세례 요한 역시 중요한 배경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잘 알고 계시다시피,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이제 하나님께로 돌이킬 시간이다 예수님이 그 나라의 주인공이다!’ 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던 하나님의 종이었죠. 예루살렘과 온 유대 백성들이 다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일갈했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경고한 것이지요.
오늘 결혼식 잔치의 비유에서도 왕이 미리 왕자의 결혼식 잔치에 초청해 놓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 삼겠다고 약속해주신 것처럼요. 유대인들은 잔치에 사람들을 미리 초청해 놓고 결혼 잔치가 준비되었을 시간 즈음에 다시 사람을 보내어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이중 초청이라고 하지요. 왕은 미리 초대된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서 “시간이 되었습니다. 왕자의 결혼 잔치에 오십시오!”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왕자의 결혼식 잔치에 미리 초청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마도 왕국의 귀족이거나 유력 인사였을 겁니다. 소위 고귀한 사람들이었겠지요. 하지만 반전이 있었습니다. 왕자의 결혼식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왕은 뭔가 이상한 걸 느끼지만 다시 한 번 다른 종들을 보내어 전합니다. “황소들과 살진 송아지들을 잡아 놓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소. 이제 결혼식 잔치에 오시오" 그런데, 왠걸, 이번에도 그들은 무시하고 떠나갑니다. 어떤 이는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갔고,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갔습니다. 종합하면, 자기 사업에 집중하느라 왕의 초대를 무시했다는 것이지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왕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예수가 주인공인 하나님 나라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무시한 것입니다. 자기 일, 자기 사업에 집중했습니다. 종교 사업 말입니다. 종교 지도자로서 자기의 권위를 지키고, 그걸 통해서 얻는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고 싶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외치면서 세례를 주었지요.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과 정의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단강에 모인 백성들은 생각했지요, ‘아직 하나님 나라 잔치가 시작도 안했는데 이 정도면, 잔치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나면 어떨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거야!’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세례 요한이라는 작자 때문에 사람들이 우릴 우습게 보고 있어! 저 놈이 우리 권위와 우리 사업을 망가뜨린거야! 그런데 뭐? 더 큰 자가 온다고? 진짜 주인공이 온다고?! 안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사명은 어느샌가 자기 사업으로 변질되었고, 성직자들은 사업가가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각자가 맡은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으로 맡겨주신 것이지요. 그 소명의 자리에서 우리 각자는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인 것입니다. 부모로 가정을 섬기고, 직장인으로 내 맡은 일을 섬깁니다, 집사와 권사, 목사로 교회를 섬기지요.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가 하듯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저와 여러분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 잔치로 부르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이야! 나는 교회다녀! 나는 구원받았어! 스스로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를 통해 어떠한 생명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떠한 잔치의 기쁨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를 부르시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는 교회에 자주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고 다니지요. 거룩한 사람인척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저 사람 왜 저래? 저 사람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거야. 너무 싫다. 망해라'라고 생각하곤 하잖아요. 부끄럽게도 저는 자주 그렇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쩌면 내가 한동안 그리스도가 베푸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관심이 없었구나 싶었습니다. 그 나라의 능력이 내 삶에 임하고 이 땅을 변화시켜 기쁨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구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 왕자의 결혼식 잔치 초청을 거절한 이들이 바로 저와 우리 아닐까요? 아무리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삶의 자리를 생명으로 일구어가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고 할지라도, 정작 지금 내 삶의 자리를 살아갈 때, 생명을 살리는 작은 차이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아니,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종교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거절한 종교인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느라, 왕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이지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왕의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폭력을 저지르고 살해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납득이 되지 않지만, 이것이 비유인 점을 감안하면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보낸 예언자들의 초청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이지요. 예레미야는 모욕과 폭력을 당했고, 이사야와 에스겔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 역시 죽임을 당했지요. 왕은 가장 기쁜 잔치, 즉 왕자의 결혼식 잔치를 열었지만, 초청받은 이들은 종들을 모욕하고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몰랐지요.
이를 들은 왕은 분노했지요.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마치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한 것처럼 말입니다. 왕은 이제 다시 종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결혼식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초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구나. 그러니 국경지대(김근수, 신현우)나 변두리(톰 라이트) 지역으로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왕자의 결혼식 잔치에 초청해서 오도록 하라"
이에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결혼식 잔치에 데려와 하객들이 가득하도록 만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학자들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번째 종들은 세례요한이었다. 이스라엘이 거절했다. 두번째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왕이 도시를 진멸한 것은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헤롯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을 뜻한다. 이후에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파된다. 선한 자, 즉 이스라엘이나, 악한 자, 즉 이방인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에 불러 모으도록 하셨다.' 아마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유가 역사상의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그대로 설명해주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 나라 잔치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대비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앞에 선 종교 지도자들은 그 스스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신하들이라고 생각했지요. 실제로도 세상 모든 나라들에 대한 제사장 국가를 자처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초청했던 사람들, 구원의 약속을 받아두었다고 자부한 사람들, 소위 고귀한 계층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왕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스스로 고귀하다, 난 다르다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치가 떨렸을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 스스로는 절대 고귀하다, 난 다르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갔지요. 변두리에 가서 하나님께 가장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 다리 저는 사람과 눈 먼 사람들, 이름없는 사람들과 잊혀진 사람들을 데려왔지요. 그 뿐 아닙니다. 국경지대로 가서 구원의 계획 바깥에 있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방인들을 데려오기 시작했지요. 왕의 뜻은 명확합니다. 구별을 두지 않고 초청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이전 보다 더 많아진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구별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복이었습니다.
왕은 결혼식 잔치 자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는데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는 한 마디 아무 말도 못합니다. 이어서 임금이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말하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도대체 예복이 뭐길래, 왕은 하객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쫓은 것일까요?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부한 사람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던 왕이 고작 결혼식에 걸맞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사람을 내쫓은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미리 결혼식 예복을 준비할 만한 처지가 안되는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왕이 연회장 입구에서 결혼 예복을 손님들에게 제공했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당시 결혼식 잔치 풍습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서 근거없는 추론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1세기 로마 황실과 유대 사회의 결혼식 예복에 관해서 깊게 조사를 해보았는데요, 그 결과 몇가지 의미 심장한 단서는 찾았지만 학문적 근거 자료로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1세기 로마와 유대 사회에서 결혼식 예복이 갖는 의미는 현재로서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러 주석서들을 찾아본 결과,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추측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더러운 옷을 입고 결혼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초대한 왕 또는 잔치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었다라는 것이었죠. 왕실 잔치의 격을 떨어뜨리고 왕을 모욕하는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것 역시, 왕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여러 해설이 있어왔는데요, 테르툴리아누스는 ‘육신의 거룩함’을 의미한다고 보았고요, 오리게네스는 ‘금욕',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대다수의 학자들(예레미야스, 루츠 등)은 이레나이우스의 견해를 따라서, 이 예복이 ‘선한 행실’ 또는 ‘의로운 행위'를 뜻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8절을 그 근거로 하는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런데 저는 어딘가 완전히 수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 22장과 요한계시록 19장은 비슷한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긴합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결혼식 잔치가 열리고 옷을 입는다는 점이 동일하지요. 하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옷을 하객들이 입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입으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을 해석하는데 굳이 왜 요한계시록 본문의 구절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가 찾지 못했어요. 또, 예복이 선한 행위를 상징한다는 해석을 들었는데, 이런 반감이 생기기도 했구요. 이럴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선한 사람만 받으면 되잖아?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다가 (사실, 이 예복을 ‘진정한 회개'로 해석하는 견해(올브라이트 & 만, 양용의)도 확인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게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옷이라는 이미지에 착념하던 중, 갈라디아서 3장 26절과 27절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를 받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깨끗한 옷을 새로 입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으세요? 게다가 오늘 본문의 맥락도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었잖아요? 세례는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이것을 계속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었지요. 또, 교회 역사 속에서 세례는 Christian(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궁극적인 성례전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복’이 바로 Christian(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례는 어떤가요? 군대 훈련소에 가면 세례식을 거행하지요. 세례를 받으면 초코파이를 더 많이 주는데요, 사회에서 직업이 뭔지, 교회로 인도한 후견인은 어떤 사람인지, 교회에는 몇 번이나 가봤는지, 말씀에 대해서 공부는 해봤는지, Christian이 되면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며 어떤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세례받고 싶은 사람 신청하세요!’ 신청을 받을 뿐이지요. 그리고 신청하는 훈련병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초코파이를 더 많이 준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세례식이 거행됩니다. 한 번 세례받은 훈련병도 다시 받을 수 있어요. 초코파이를 더 먹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세례 받겠다는 각오가 비장했습니다.
웃자고 군대 훈련소 세례식을 말씀드렸지만, 사실 4세기 이전의 교회의 세례식과 비교해 보면, 요즘 한국 교회의 세례식 역시 초코파이 세례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느껴집니다. 로마제국의 박해가 있었고 소수종교에 불과하던 시절,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비 사형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알렌 크라이더-회심의 변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는 10년마다 40%씩 어마어마한 성장을 했는데요, 무슨 전도프로그램을 한 것도 아니었고, 걸출한 워십 리더가 이끄는 예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Christian들의 삶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신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나그네와 여행자를 환대하는 사람들,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고 세심하게 돌보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Christian의 품격과 매력을 보여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세례를 받는 절차를 통과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소속과 신념(믿음), 행동이 모두 변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세례였습니다. 3년에서 5년도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우상숭배나 성적인 타락, 살인과 관련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삶을 거부해야 세례 절차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군인이라면 살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고요. 기본적인 신앙 교육과 함께 삶의 행동들 역시 고쳐나가야 했습니다. 선한 삶을 살았는지, 과부들을 존중했는지, 아픈 사람들을 돌아보았는지, 각종 선한 일들을 실천했는지를 확인한 후에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알몸으로 물 속에 세 번 몸을 담그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믿음을 고백한 후 물 속에서 일어났을 때, 비로소 세례자는 새 옷을 입게 됩니다. Christian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매력적인 명품이 있으면 가짜들도 생겨나지요? 명품 Christian Dior이 있으니 짝퉁 Christian Dior도 생겨납니다. 그런 것처럼 짝퉁 Christian도 있습니다. 소속과 신념, 행동이 변화하지 않은 채 입술로만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합니다. 왕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쫓아내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죠. 그런데요, 여기까지만 놓고보면, 예복을 선행이라고 해석하는 것과 Christian이라는 신분이라고 해석하는 것과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걸까요?
제가 초기 교회에 세례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쭈욱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사실 별로 자신이 없어요. 제 스스로 제가 어떤 수준인지 아는데 이렇게 고결한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는 거예요. 제 스스로 별로 선하지도 않고 악독할 때도 있는데 이걸 살아낼 수가 없잖아요? 그럼 나는 어떻게 진짜 Christian이 되지? 나 짝퉁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려고 이것 저것 찾아보던 차에 그림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요.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린 이 그림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지! 맞아! 희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지! 예수님이 나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실 거야!”
예수님이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실 거라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의 부족함을 내어 맡기는 사람이 바로 진짜 Christian, 진퉁 Christian인 것입니다.
어제는 넘어지고 실수했을지라도, 오늘 다시 그 더러워진 옷과 상처를 예수님께 내어 보이고, 그 분 손의 이끄심을 따라 한 걸을 다시 내딛는 사람이 바로 진퉁 Christian인 것입니다.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19세기 러시아의 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그림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데요, 이 그림은 가로 길이 7m, 세로 길이 6m 크기의 어마어마한 대작으로 현재 ‘트레챠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1825년 12월 러시아에서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일로 주동자 다섯 명이 처형당했고, 1,000여 명의 젊은 지식인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지요. 화가 이바노프는 황실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 유학 중이었지만,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그리기 시작한거죠. 그런데, 이로 인해 이바노프는 불순한 반정부 세력으로 찍혀 불우한 생활을 연명하게 되었고, 미술 아카데미 교수였던 아버지도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죠. 그래도 이바노프는 예술과 조국에 대한 자존심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탈리아에 20년간 머물면서 이 대작을 완성한거죠.
이바노프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이바노프는 아마도 좌절한 러시아의 민중들을 생각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의 중앙에는 십자가를 든 세례 요한이 우뚝 서 있는데요, 세례 요한 역시 절망적인 현실을 상징하는 광야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죠. 어쩌면 이바노프 역시 이 그림을 통해 세례 요한의 음성을 민중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변두리의 사람들, 국경지대의 사람들, 스스로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 좌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어! 희망을 잃지 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시 그림 왼쪽 하단으로 가보겠습니다.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요, 옷을 갈아입고 있는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서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변화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른쪽에 갈색 옷을 입고 수염이 길게 난 사람이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세례 요한을 쳐다보고 있지요. 아마도 제사장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로 보입니다. 그 주변, 그러니까 그림 우측 뒷편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습니다. 의심과 적대감이 가득하지요. 말을 탄 로마 군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푸른 옷을 입은 예수님이 저 멀리서 걸어오기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은 아직은 저 멀리 보이는 예수님을 알아채고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치지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바로 그 순간, 이 외침을 주목해서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께로 향합니다. 세례요한 뒤에 서 있는 세 명을 볼까요? 붉은 머리카락으로 그려진 요한과 그 뒤에 선 베드로와 안드레 역시 예수님의 등장에 놀라며 설렘과 놀라움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평소 이렇게 가르쳐 왔지요. “나는 너희에게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삶에 이제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수준의 변화를 일으키실 거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극적인 주인공 등장씬이 있다면 아마도 바로 이 장면일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등장 인물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 뒤쪽으로 네 번째, 민트색 옷을 입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세례 요한의 손가락에도, 예수님의 등장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니콜라이 고골인데요,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소설가)로 죽은 혼, 검찰관, 코, 외투 등의 소설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이바노프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 또한 자신의 소설을 통해 러시아의 현실을 변혁하고자 노력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고골은 참혹한 러시아의 현실에 좌절해서 모든 희망을 접어버립니다. 현실을 변혁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다가 현실을 외면했죠. 결국 변절자가 됩니다. 자신이 비판해왔던 전제 정치와 농노제 등 사회 부조리와 지배 권력을 옹호하고, 종교 권력의 지배에 순응하고 나선 것이지요.
알렉산드르 이바노프는 이 그림에 왜 고골을 그려 넣었을까요? 그것도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과 같은 편에 말입니다. 그건 어쩌면 세례 요한을 따르는 것 만으로는, 물 세례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과 정의가 가득한 곳으로 바꾸고 싶지만, 실은 우리 스스로는 변화할 능력도 변화시킬 능력도 없다는 것을 고골의 삶을 통해 보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바노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눈을 감고 있는 고골에게, 스스로는 선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어 체념한 채 살아가던 저와 여러분에게, “제발 눈을 떠! 저 멀리,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아라! 그분에게 희망이 있어! 그분이 변화를 가져오고 계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 아닐까요?
말씀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교회력 복음서 말씀인 ‘결혼식 잔치의 비유’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그림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함께 살펴보았지요. 이를 통해 우리가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세 문장으로 요약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과 그의 도우심에 지금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진퉁 Christian의 옷을 입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잔치 자리로 바뀔 것입니다.’
바라기는 매일 세례를 기억하며, 여러분과 함께 죽으시고 여러분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너른 품과 한 없는 능력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윤석기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