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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잇 Jul 07. 2019

영화 <더 스퀘어(The square)>

그 공간은 사실 우리가 아는 가장 넓은 네모


<더 스퀘어>는 2017년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루벤 웨스틀룬드의 작품으로 예술인과 지식인에 대한 풍자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지식인'과 '예술인', '대중'의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 이는 현대인 전체에 대한 풍자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안식처.
그 경계 안에서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한다.



영화의 제목인 <더 스퀘어>는 영화 안에서 진행되는 동명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전시회를 위해 박물관 앞 바닥에 '스퀘어'를 만든 후 '스퀘어'에 대한 정의를 새긴다.


더 스퀘어의 정의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스퀘어>는 '스퀘어'의 이야기이자 우리 사회의 이야기다. 죽은 듯이 쓰러진 노숙인의 앞에서 이웃을 돕자고 소리치는 사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 일촉즉발의 위기에 닥친 여성을 외면하는 사람들, 즉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모습들을 영화는 끊임없는 레이어로 담는다.


주인공인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앙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크리스티앙이 나쁜 사람일까? 영화는 여러 가지 개별 사건으로 보통의 인간이자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크리스티앙을 담는다.


어느 날 출근길, 크리스티앙은 소매치기를 당한다. 휴대폰과 지갑, 할아버지의 유품까지 도둑맞은 후 GPS를 추적해보는데 훔쳐간 사람이 사는 곳은 멀지 않은 아파트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미술관 소속 후배의 아이디어로 협박장을 쓰게 되는데 '옳지 않은 행동이지 않냐'고 말하던 크리스티앙도 금세 동조한다. 막상 실제로 협박장을 넣어야 할 순간이 오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룬다. 크리스티앙은 그 때라도 그만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키기에 민망했던 그는 결국 스스로 모든 아파트 세대에 협박장을 집어 넣고, 도망치듯 떠난다.


휴대폰에 정신이 팔린 크리스티앙은 '더 스퀘어'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의 제안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승인하고, 담당자들은 비극을 영상에 담아 상품화시킨다. 책임은 온전히 크리스티앙의 몫이 된다. 그렇게 크리스티앙은 기자회견에 나서게 된다.


'더 스퀘어'를 설명하는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앙의 말에 모든 참여자들은 주의를 기울여준다. 요리사의 등장에 우르르 퇴장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무의식 중에 크리스티앙과 요리사 두 사람의 계급이 나뉘어져있다.


크리스티앙의 협박장을 받은 어떤 아이는 부모님에게 도둑으로 몰려 혼이 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부당하게 도둑으로 몰려 화가 난 아이는 크리스티앙을 찾아간다. 크리스티앙은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대충 대답한 뒤 아이를 내쫓아 버린다. 뒤늦게 사과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크리스티앙이 협박장을 돌렸던 아파트로 찾아가지만 아이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다.


미술관에서 예술가들을 초대한 파티가 열린다. 오랑우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행위 예술가는 연기를 그만하기로 약속이 된 순간, 멈추라는 크리스티앙의 말을 듣지 않는다. 연기의 도가 지나쳐 한 여성에게 극도로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부분에 다다른 순간. 두려움과 당황스러움, '먼저 나서기 좀 그렇지 않나-' 하는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외면한다. 폭력적으로 고요한 상황을 한 사람이 나서서 타개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한 사람이 나서고 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람인 척 행위 예술가를 욕하고 거칠게 제압한다.



평소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누리는 우리는(기득권은) 인지하지 못 한 상황에서 모순적인 행동을, 혹은 비열한 행동을 하곤 한다. 크리스티앙이 세븐일레븐에 앉아있던 노숙인에게 치킨 치아바타를 던지며 '양파는 알아서 빼라'고 말한 상황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형편이 넉넉지 못한 학생에게 패딩을 기부하려고 할 때 특정 브랜드를 바라자 '주는 대로 받아야지'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거지는 거지다워야 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기득권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아이보다는 어른이, 장애인보다는 비장애인이, 노숙인보다는 비노숙인이 그렇다. 생각없이 누릴 수 있는 보통의 권리가 많으면 자신을 보다 기득권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더 스퀘어>에서 관객은 계속해서 불편한 상황에 부딪힌다. 그러한 상황에서 크리스티앙은, 또 다른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할 법한 행동을 한다. 그래서 관객은 불편하다. 결국 사과를 받지 못한 아이가 돌아간 뒤 어두운 아파트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환청 같은 '도와주세요(Help me)!'와 비슷하다. 끊임없이 자행하는 우리의 불합리한 행동을 담담하게 스크린에 담아낸 블랙 코미디. 연출이 관객에게 친절한 편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더 스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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