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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님, 우리 애들 때리지 마요!

3-2. 어느 날 방송국을 나오면서

by 얼굴씨
때리지 마요


딱밤 한 대 때릴 뻔




작가 공채뿐 아니라 라디오 진행자도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먼저 꾸려진 제작진은 대낮 황금 시간대를 강타할 신선하고 재밌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자 퇴근 없는 회의를 이어나갔다.

티브이에도 대대적인 광고를 했는데, 전국에서 좀 웃긴다 하는 사람들이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업계에서는 이미 그 실력을 검증받은 대학 개그동아리 출신의 참가자들도 하나둘 오디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개인기와 여러 미션 결과를 종합해 진행자 5명을 선발했는데, 요즘처럼 오디션이 난무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당시엔 꽤나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렇게, 프로그램에 관련된 사람들만 열명이 넘어가는 덩치 큰 팀이 되었다.

4명의 작가진도 모두 신인에, 진행자들도 신인.

그야말로 천하무적이거나 혹은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는 존재였다.




많고 많은 방송의 제약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생방송은 이어졌다.

초반엔 신생 프로그램 홍보 차 유명 연예인들이 번갈아 가며 게스트로 출연해 주었다. 나중에도, 귀로 듣는 라디오 특성상 목소리가 익숙한 그 누군가는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우리는 스타 섭외에 총력을 가하여 화려한 라인업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누군가는 라디오 작가의 휴대폰이 그의 능력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라고 말한다. 폰 속에 얼마나 많은 섭외 대상자의 연락처가 있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그만큼 스타 섭외 능력은 라디오 작가가 갖춰야 할 필수 자질인데, 나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섭외를 잘하려면 업계의 특성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라디오국 부스에서 원고를 쓰고 있으면 음반을 낸 신인 혹은 기성 가수 매니저들이 CD를 들고 홍보를 다녔다. 아주 초초신인일 경우 가수 본인이 직접 홍보를 하기도 했는데, 출입구부터 번쩍이는 의상이 등장, 머리에 기름진 포마드를 바르고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난다 싶으면 그건 신인가수일 확률, 100프로였다.

생방 원고와 녹음 원고 등 마무리할 대본 작업에 늘 분주해하고 있으면 책상 앞으로 슬쩍 와서,


안녕하십니까! xxx 이번에 앨범 나왔습니다아아아.


하고 한참을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 각도가 되게 중요한데, 처음 듣는 신인일 경우 몸을 반으로 접어 한참을 펴질 않았다. 처음엔 너무 송구하고 불편해서 나도 일어나 한참을 같은 모양으로 폴더 인사를 하곤 했다. 나중에는 내 부스 앞에서 체류 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아 이거 초초신인이구나 하면서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네 거기 두고 가세요.


눈은 노트북 원고에 가 있고 말로만 인사를 전했다.

바빠서 그랬다, 바빠서.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반대로,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른 이들의 매니저는 인사를 잘 하지 않았다. 부스를 유유자적 지나치면서 CD만 쓱, 놓고 갔다. 대형 기획사의 매니저들은 늘 끝내주게 차려입고 다녀서 처음엔 신인인가, 한참을 보기도 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바쁜 작가나 피디들, 굳이 신경 써서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노래는 나갈 것이고, 그래도 명목상 홍보는 해야 하니까 딱 할 일만 하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작가와 눈이 마주치면 그냥 가벼운 미소만 씨익, 날리고 지나갔다. 되게 있어 보이게!

가요 프로 1위, 유행의 최정점을 찍는 가수일 경우 신인과는 반대로 작가나 피디가 CD를 요구하기도 했다.


꼭 싸인 넣어서 주세요! 꺅! 감사해요!

다음에 저희 프로, 1번으로 스케줄 잡아주시는 거 꼭 잊지 마세용!


그리고 심지어 피디와 커피도 한잔 하며 가진 자의 여유를 누렸다.

이렇게 다르다.


연예인 안 하길 천만다행.




라디오는 노래가 주인공이라 작가는 주로 가수와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팀은 프로그램 특성상 개그맨들과도 일을 많이 했다. 가수는 기본이고 배우나 모델 등이 출연하는, 즉 모든 분야에 걸쳐 섭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만났던 수많은 연예인 중, 특별히 기억나는 몇몇이 있다.

유명한 음악인인 그는, 나 역시 좋아했던 스타였다.

옆에 가면 진한 향수가 코를 가격해서 늘 구강호흡으로 전달사항만 얼른 말하고 뒤로 빠져야 했다.

그럴 때마다


아 귀 찢어져. 저쪽에서! 멀리서 말해!


어릴 때 갖고 놀던 종이컵 전화기라도 준비했어야 했나.

선발된 디제이들과 함께 공동 진행을 몇 번 했는데, 개그 프로그램이니 당연히 이런저런 개그가 오갔고, 청취율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생방이 끝나면 진행자들의 표정이 유난히 안 좋고 말수도 확연히 줄어드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옥상에 데리고 가서 애들을 때렸다는 거다. 조인트 깐다고 하던가? 짧은 다리로 애들 정강이를 그렇게 때렸단다.


방송 중에 싸가지가 없어서.


웃기는 데에도 예의가 필요한 것은 맞다. 선을 넘으면 보는 사람도 불편하다. 그런데 이미 짜인 대본이 있고 애드립을 치더라도 그 안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한다. 신인들이 발발 떨며 얼마나 긴장했을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잘못이 있으면 말로 타이르면 되지 시대가 어느 시대라고,


우리 애들을 때려!!!!

(대부분 나보다 어리고 또 동료애가 생기면서 나는 어미새처럼 '애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선배에게 맞고, 누가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이후로 방송은 심하게 조용했다. 웃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고급스럽지도 못했다.

최민수, 김창렬 같은 소위 '쎄' 보이는 게스트들은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했다. 어리숙한 진행자 후배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노련하지 못한 우리 제작진에게도 시종일관 웃으며 파이팅 할 수 있게 용기를 줬다.

몇몇 인성이 덜 된 연예인들이 문제였다. 아니면 그즈음 유독 예민한 시기를 보냈었던가.

신인이라는 이유로 우리 애들을 무시하고 욕하고 때리는 만행들을 종종 목격했다.

물론 작가인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 봤다고 반말 시전에, 면전에 대고 자기 예민하다며 쌍욕을 날리고, 어디가 이쁘다, 옷이 어떻다 하는 성추행적 발언은 기본 옵션이었다.

대신, 방송 시간이 다가와 ON 버튼에 불이 들어오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었다.


아 정말 연예인 안 길 천만다행이다.




다음 편 이어집니다.


-연예인 에피소드는 매우 개인적인 의견일 수 있습니다. 특정인을 저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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