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들의 공격은 여전했지만, 몇 번 겪다 보니 도피처도 생기고 함께 욕해 줄 동료도 만나고
가끔은 금도끼은도끼 산신령 같은 선배가 강림하시어 통쾌한 해결책을 내려주기도 했다.
상처가 아물면서 도톰한 딱지도 생기고,
슬슬 적응이란 걸 해가며 나름 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도 같다.
아무도 만들지 않는 작가 명함을 파며 이걸 몇 장이나 찍을까 고민하기도 했던 즈음.
하지만
내 경력을 책임져 주지 않을 선배의
가벼운 조언에 여전히 내 귀는 순간순간 팔랑거렸다.
그리고 뭔가 더 큰 무대가 날 기다릴 것만 같은 두근거림에
일단 도전이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포트폴리오를 낸 것이었다.
혹시나 바로 드라마로 옮기게 되더라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카드값은 언제나
출금 대기 중이었고,
유명인들 사인도 넉넉히 받아둬야 할 것이었다.
공중파 방송국에 네임텍을 걸고 언제 또 와 볼지 모르므로, 군데군데 기억에 남을 만한 스폿에서 사진도 찍어놔야 했다. 사람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어디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때를 대비해서 그땐 미안했었다고 몇몇에게 심심한 사과도 해야 할 것이었다.
야, 너 그 짐, 그게 다 뭐야?
나를 뽑아준 CP였다.
잘렸는데요. 아니다, 제가 그만둔다고 했어요. 아니다, 잘린 건가.
어디로 가는데? 누구 피디?
저 라디오국 나가요.
응? 뭐야. 무슨 일인데, 얘기를 하지 그랬어.
엇, 나를 잡아 줄 것 같은 뉘앙스였다.
그렇다면 마땅히 잡히리.
쯧. 그래 잘 가고, 연락해라.
내가 이렇게 1분 컷 이별을 당할 그런 인스턴트 같은 존재였나?
파란만장한 이 서사의 끝이 저 영혼 없는 한 문장이라고?
바짓가랑이는 못 잡아도, 그래도 한두 번의 아쉬운 만류쯤은 있을 것 같았는데 그건 완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한 달 전부터 전한 상태였고, 그럴 때마다 담당 피디는
웃기지 마 어딜 가. 너 못 가. 나는 어쩌라고.
우리 팀은? 우리 진짜 잘해봐야지.
하면서, 마치 내가 아니면 우리 프로그램이 전혀 굴러갈 수 없을 것처럼 말했었단 말이다.
범접불가한 실력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이력으로 요새를 구축한 것도 아니면서
대체 그런 오만함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간의 부당함을 자만으로 앙갚음하겠다는 그 철없던 생각도 결국 다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나에게 담백한 작별을 고하는 피디의 뒤로 어설프게 웃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내 후임이었다.
피디는 나를 만류하는 척하면서 이미 모든 세팅을 다 끝내놓고 있었다.
세팅 첫날이 바로 내가 짐을 싸는 그 당일이었다. 다음날도 아니고, 일주일 후도 아니고, 당일 생방 세 시간 전에.
하필, 왜 그날 핫핑크 원피스를 입었을까. 머리에는 왜 스팽글 머리띠를 하고, 왜 풀 메이크업을 했을까.
아마도 상큼한 초여름날, 근처 홍대에서 테킬라 한 잔 하고 춤도 추겠다는 조촐하고도 사적인 자리를 마련했었겠지. 앙증맞은 벚꽃은 바빠서 못 봤지만, 레몬 같은 공기가 이리저리 팡팡 터지던 6월이었다.
이번 봄개편에도 무사히 살아남았겠다, 뒤늦은 축배를 들려했겠지.
그렇게 생방 원고를 수정하다 말고, 나는 잘렸다. 아니 분명히 내가 나간다고 했지만 모든 정황상, 잘린 것도 같았다. 작가라고 하기에도 왠지 좀 애매한, 쓴 시간에 비해 공인된 이력이 너무도 초라한 나는 습관처럼, 시트콤의 클리셰처럼 또 그렇게 돼 버렸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하필 날씨까지도 기가 막히게 좋던 날, 늘 초조하던 생방송 그 시간 즈음에 나는 그렇게 방송국을 걸어 나왔다. 네임택을 반납하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미소로나마 나를 배웅하는 사람은 1도 없었다.
독한 것들, 저 방송국 놈들.
문제는, 드라마 쪽에도 있었다.
마포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둘셋 정도의 보조작가들이 작가님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방 하나를 다 차지한 책상 위엔 갖가지 책들과 프린트물들이 쌓여 있었고, 커다란 화이트보드는 수많은 회의를 거쳐 갔을 보드마카 자국들로 얼룩져 있었다. 직전의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친 후라 차기작에 무게를 실으려는 모양이었다.
보조작가들은 다른 학교 문창과 졸업생이었는데, 역시 이 바닥은 좁아서 몇 번의 호구 조사를 거치니 후배의 친구, 동기의 후배 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들 학부에서 글 좀 썼다는 작가들이었다.
아예 숙식을 하는지, 방 한 칸엔 이층 침대도 있었는데 이부자리가 널린 꼴을 보아하니 쓰다가 자다가 쓰다가 자는 그런 글감옥에 있는 것이 뻔해 보였다. 보조작가와 첫 대면에서도 목 늘어진 티셔츠에 산발을 한 채 안경 너머로 삐죽 눈인사하는 것이, 적어도 이 감옥은 무기징역 이상이겠다, 감이 왔다.
면접은 좋았다. 포트폴리오를 다 보고 작가님은 숙제를 내주었다.
내 소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을 단막극으로 각색해 오라는 것이었다.
이거 말이야. 씁. 이렇게 쓰면 안 돼.
드라마는 아, 이렇게... 씁.
이거 아니야. 이거 안 돼.
애초에 작가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웃긴 것만 쓰다가 심오한 멜로를 써서 그랬을까?
다른 걸로 다시 써 올게요.
이미 직장을 잘린 터라 절박했다.
음, 다시 써도 이게...
글쎄 생각을 좀 해 보자. 집이 XX근처라고 했지? 내가 바빠서 그러는데 가면서 얘기하자.
마침 작가님은 모교에 볼 일이 있었고 우리집과는 십분 거리였다. 오피스텔을 나와 한 시간여를 달리면서 드라마 대본이란 무엇인가, 이론서에 나올 법한 얘기들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원고를 까인 터라 피드백이 절실했으나, 내 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드라마를 처음 써 보는 신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정직한 조언이었을까.
작가님은 모교 근처에서 누군가와 서류를 주고받고, 나는 좀 걸어야 할 정도의 거리에서 내려 집으로 갔다.
머릿속엔 온통 뭘 어떻게 써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다시 각색을 해 간 날, 제일 고참 보조작가와 작가님 그리고 나는 간단한 안주를 곁들여 와인을 마셨다. 내 작품을 대충 돌려 읽은 후였고, 집필 중인 드라마의 방향과 전작 캐스팅 비화, 연예인 가십 등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송별회일지 환영회일지 모르는, 너무나도 궁금하고 불편한 자리였던 터라
와인잔만 빙빙 돌려가며 하염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자, 일단 드라큘라 한 잔씩 하자구.
와인잔에 반은 맥주를 나머지는 와인을 채워 흐리멍덩한 자색을 띄는 기분 나쁜 색감.
처음 마셔보는 폭탄주 두 잔에 나는 전사했다.
소주 네댓 병은 가볍게 마시던 내가, 그 낯선 두 잔의 알코올에 속수무책 정신을 잃고 있었다.
팔다리가 풀리고 구토가 치밀었다. 너무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며 변기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들렸다. 선명하진 않지만, 주제는 정확히 파악됐다.
이 언니는 뭐예요? 이거, 이 작품, 선생님 스타일 아니잖아요. 이거 별로잖아요.
솔직히 진짜 못썼는데!
왜요! 선생님, 이 언니 뽑으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 들어봐 봐, 내가 XX 이한테 부탁을 받았고...
아뇨! 됐어요, 됐구요! 선생님은 이미 객관적이지 않아요! ㅎㅅㄱㄴ;ㅔㅔㅑㅛ, ㅇ랃 넴,ㄱ[ㄴ;ㄿ,프젷
너 취했다.
아뇨! ㅎㅅㄹㄷㅌ허ㅐㅕㅠ;[.ㅜㅠㅊ허 저는 취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집엔 왜 데려다주셨어요! 왜요!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그런 거 안 해주셨잖아요.ㅎ믜ㅔ닾;[ 오 터ㅟㅟ!!!
아니 그게 그쪽에 일이 있어 가지구...
작가님은!!!
언니를, 사랑하시잖아요!!!
내가 지금은 변기에 얼굴을 쳐 박고 있지마는, 당장 나가서, 내가,이 변기 말고 쟤 얼굴을 붙잡고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아니라고 그런 거 진짜 아니라고, 나는 순백의 요정처럼 너무 결백하다고 외쳐야만 했다.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힘없는 곤충처럼 떡 변기에 붙들려서는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어서려고 고개를 들면 다시 웩, 이제는 좀 괜찮을까 하고 고개를 들면 다시 몸이 풀썩, 그렇게 나는 화장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이이, 사랑 어닌데 진짜 이반엔 그런 거 어닌데에에에에 나 진짜 작거님하고 아무 일도 없았는데에에에 진짜 나 이번앤안되난데 우우우우 징짜 그 땐 일이 있아서 우리집 허고 거꺼워소 그런 겅데 우우우우우 나 이반에도 이렁 일로 얽히면 진쩌 넘 억얼해 작까님 아니라고 말해요 빨리요 진짜 아니라고 말 좀 해 주세요오오우우우우우
그렇게 변기를 부여잡고 외치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일어나. 해장하러 가자. 쌀국수가 최고야.
보조작가는 토사물을 잔뜩 묻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철저히 가린 채, 침대에 미처 올라가지 못 한 듯 바닥에 널브러져 일어나질 '못'했다.
못, 인지 안, 인지는 모르겠으나.
저기... 안 되겠다.
이 글로 우리 작업실에선 안 돼.
드라마 쓰지 마. 그냥 쓰던 거 써.
대신 내가 진짜 실력있는 감독 아는데 마침 함께 쓸 작가를 구하더라고.
생각 있으면 말해. 영화는 해 봤다며.
그쪽 급한 거 같던데.
저기, 진짜 제가 못 써서 안되는 거죠?
응? 어... 왜...?
진짜 다른 이유는 없는 거죠?
왜, 혹시 어제 XX이가 한 말 들었니?
아니요. 어제는 완전히 필름이 끊겼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저는 드라마를 너무 못 써서 잘린 거네요?
XX 때문에 오해하지 마. 팩트는, 실력이야. 내가 지금 누굴 가르치면서 쓸 상황이 안 돼. 급하고 바쁘다.
순전히 글 실력이 안 돼서 잘린 건데, 그렇게 기분이 산뜻할 수가 없었다.
무기징역의 까마득한 감옥에서 막 탈출한 사람처럼 홀가분했다. 저기 있다가는 사형수로 바로 처단될 나였다. 누구의 모함이든, 실력이든, 술주정이든, 뭐든, 형장의 참이슬로 사라질 게 분명했다.
나는 완벽한 실직자가 됐고, 무엇보다 작가님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도, 그럴 생각이 1도 없는 게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