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석희 사건이 남긴 질문
나는 그 사건 자체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내가 보게 된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황석희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화면 속에서 반짝이는 그를 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알던 그가 저렇게 됐구나. 신기하네. 하긴 실력이 있으니까. 그 감각의 정체를 오래 설명하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나는 그때, 무언가를 승인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내가 알고 있다고 느낀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그를 인식한 건, 그가 아직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 작은 작업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입소문처럼 떠오르던 시기. 그때 나는 그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같은 장 안에 있다는 감각,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충분히 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호감이라기보다 반가움에 가까웠다. 이 장에 필요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감각. 나는 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차지한 자리를 먼저 받아들인다. 어떤 감수성, 어떤 태도, 어떤 언어. 이 조합이 하나의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에 누군가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승인한다. 사람이 아니라 위치를. 그리고 그 위치에 사람을 붙여, 안다고 느낀다. 이건 착각이 아니다. 구조다. 그래서 지금 무너진 것도 단순하지 않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깨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알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전제가 무너졌다.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감각,
서로 이해 가능하다는 믿음,
최소한의 윤리적 기준이 공유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 위에서 관계는 형성된다. 그리고 지금, 그 바닥이 사라졌다.
이상한 것은 시간이다. 내가 그를 처음 인식했던 그 시기에, 이미 다른 일은 끝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인물을 반가워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던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단순한 폭로로 읽히지 않는다. 폭로는 새로운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일은 다르다. 이미 있었던 것이, 이제야 의미를 갖는다. 그가 예능에 나올 때 느꼈던 그 묘한 감각. 지연된 편지처럼, 의미는 항상 나중에 도착한다. 그래서 그 반가움도, 그 승인도 지금에서야 다르게 읽힌다.
지금 그의 이름은 지워지고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한 가지를 생각한다. 지우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지워진 자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어떤 작품에서 받은 감동이 그의 번역을 통해 전달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감동이 오염되었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감정은 통로를 지나오지만, 그 자체로는 내 것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따로 있다. 내가 그를 알고 있다고 느꼈던 감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순간,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고 믿었던 그 전제. 그것들이 지금 다시 읽히고 있다.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은 우리가 사람을 선택할 때, 사실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존재를 고른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다는 증거를 계속해서 수집한다.
나는 그때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어떤 감수성, 어떤 태도, 같은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감각. 그것들이 쌓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나는 그 이미지에 사람을 붙였다. 그리고 지금 ,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왜 이미 존재하던 사실을, 이렇게 늦게 이해하게 되는가. 어쩌면 우리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지가 아니다.
우리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어떤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