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비님은 저 멀리 출타를 하시고 어제 낮에만 해도 잠깐 코빼기만 삐죽 들이밀길래 늦은 저녁에라도 부디 많은 비를 뿌려달라고 기도문을 작성해놓고는 설마 비가 오겠나 싶었다. 그분께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신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저 우산을 챙겨 왔으니 비가 안 오겠거니 싶어서 쓴 기도문이었는데 이 심술궂은 양반이 내 마음을 읽었는지 어제저녁 폭우를 쏟아주셨다. 이렇게 소원을 들어주실 거라고 한다면 이왕이면 '펴엉생 놀고 먹어도 될 재물'이나 보내달라고 할 걸 그랬는가 보다. 그런데 이분 워낙 심술궂은 분이시라 나 좋아라 하는 소원은 잘 안 들어주시는 양반이니 기대도 안 한다.
오후 5시였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느닷없이 생일'이라며 긴급공지를 때렸다. 그리고 '갑자기 회식'이 잡혔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회식 공지라니. 게다가 월요일부터. 빠지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빠지면 안 될 거 같았다.
일하다가 조금 늦게 회식장소로 향했다. 전화를 하니 곰장어 집이란다. '곰장어?' 전에 먹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장어라 하니 장어랑 비슷한 거겠지 싶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회식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곰장어와 부딪혔다.
곰장어를 먹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생긴 게 아주 더럽게 못생겼다. 웬만하면 더럽게 라는 표현은 잘 안 쓰는데 정말 더럽게 못생겼고 징그럽게 생겼다.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나의 젓가락질은 깨작거렸다. 조금이라도 설익은 부위를 먹게 되지 않을까 싶어 고기를 굽는 동료직원에게 물었다.
"이거 먹어도 돼요?"
그러자 나이도 한참 어린 직원들이 웃으며 꼭 아이가 엄마한테 고기 먹어도 되냐고 묻는 거 같단다. 아이참. 내가 그리 동안이었단 말인가? 착각은 내 맘이다.
가게 안 테이블도 있었지만 가게 밖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바로 앞에는 아주 자그마한 회전 교차로가 있었는데 가끔 오가는 대형 버스들이 가속을 붙이며 코앞에서 회전을 할 때면 스릴 넘쳤다. 약 3m 거리쯤 되는 거 같긴 해도 버스가 회전할 때마다 비스듬하게 쏠릴 때면 깜짝깜짝 놀랬다. 신기한 건 8명 중에 나 혼자만 놀란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대체 뭘 먹었길래 겁이 없지?
그러던 중 하나 둘 떨어지던 빗방울이 금세 굵어지며 후드득 후드득 쏟아졌다. 숯불 위로 떨어지니 재가 날렸다. 술상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고 급하게 고기와 젓가락만 들고 가게 안으로 피신하였다.
안으로 들어오니 밖에는 비 오는 소리로, 실내는 사람들 소리로 가득이다. 한쪽 테이블에선 나이 드신 직장인들끼리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고성이 오갔고 다른 쪽 테이블에선 목소리 큰 여직원님이 다른 동료들에게 자기 입장을 펼치고 있었다. 여보세요. 그런 얘기는 회의 중에 하시거나 회의실에서 하세요. 어차피 술집에서 하는 얘기는 대체로 알코올과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왜곡된다. 술집에서는 말 그대로 알코올과 함께 사라져도 될 얘기를 하는 곳이다. 가끔 직장상사에게 딸랑이를 굴려서 점수라도 따든가.
술자리에서 직장상사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면 다 들어줄 것 같지? 절대 아니다.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직장상사는 그 말을 가슴에 그대로 새긴다. 그리고 너만 나쁜 놈이 되는 거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좀 조용해지니 우리도 자리를 뜨자 한다. 마침 비도 그쳤고 해서 다들 2차로 가려고 했다.
슬슬 신데렐라처럼 2차가 아닌 집으로 모올래 내빼려고 준비를 하려는데 어쩌다 보니 손에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줘야 바람과 함께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여직원에게 건네니 생일 주최자인 동료가 와서는 여직원 손에서 케이크를 빼앗아 다시 내 손에 쥐어줬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케이크를 쥐어줘야 사라지지 못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혹시 자네, 관심법? 결국 딱 걸려 바람과 함께 사라지기는커녕 앞장서서 2차 장소로 향했다. 아마도 죄지은 사람이 딱 잡히면 이런 심정 이리라.
2차로 간 장소는 의외였다. 대부분의 회식이 그렇듯이 그냥 그렇고 그런 맥주집일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늘 지나치고 늘 가던 길이었는데 그 골목에 이런 분위기 좋은 술집이 있었다니. 몇 년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몰랐던 곳이었다.
인원이 8명이나 되다 보니 꼭대기로 안내되었다. 백열등 전구의 은은한 불빛 아래 지붕과 지붕으로 연결된 공간이 야외 테라스처럼 이어져 있었다. 맨 위층은 원래 그냥 옥탑방이 있는 옥상 같았다. 옥상 주변을 수많은 화분들로 장식하였고 지붕도 있었다.
천장에 줄줄이 이어진 백열등은 화장실 안의 백열등과 같은 전구일 뿐인데 왜 이다지도 아름답고 사람 마음을 앗아가는 걸까. 이 심장 도둑 같은 놈아.
이윽고 술과 안주가 오고 수다가 버무려지며 2차의 자리도 잘 버무려진 양념 숯불갈비처럼 익어갈 무렵 불빛이 번쩍 거리는 게 보였다. 누군가 캄캄한 가운데 사진기 후레시를 터트린 것이라 생각했다. 머지않아 천지를 울리는 쿠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천둥 번개였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굵은 빗방울이 드럼을 두드리듯 옥상 위를 연신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이런 순간을 위해 모든 감탄사를 가져다 붙여야 할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일 년이 뭐야. 십 년 중에도 이런 광경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일부러 집중호우 일을 쫓아다니지 않는다면 만나기 어려운 장소와 날씨의 최적의 궁합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빗방울이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과 소리들이 옥상을 가득 메우니 술 한잔 하던 다른 테이블의 처자들이 하나 둘 옥상으로 올라와 폰을 꺼내 들어 촬영에 들어갔다. 덕분에 이쁜 처자들을 바라보는 서비스는 바라지도 않았던 덤이었다.
조물주야. 이 심술궂은 조물주야. 오늘 밤 내 심장을 가져가고 싶었던 게로구나. 오늘의 니 목적은 거기에 있었구나. 안돼. 가져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들어 두었다.
그냥 우산을 챙겨 왔으니 비나 좀 뿌려달라고 했을 뿐이었는데 이런 걸 표준말은 아니지만 "개이득"이라고 하나? 앞으로도 이 심술쟁이 조물주님이랑 밀당을 좀 하다 보면 더 좋은 날도 볼 수 있겠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테이블 사람들이야 뭐라 떠들든 내 시선은 비 오는 풍경으로 빠져들어갔다.
이 밤, 이대로 주머니에 넣어두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어제 일이라니.
시간이 멈춘다거나 늦게 간다거나 혹은 다시 뒤로 감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나.
사진은 빗방울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있었던 이들의 마음의 눈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을까.